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차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까요
** 한국일보 시 당선작 **
** 심사평 **
<전략> 우리는 이원하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외 4편을 만장일치로 꼽았다.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란 시에서도 느낀 거지만, 거두절미하고 읽게 만드는 직진성의 시였다. 노래처럼 흐를 줄 아는 시였다. 특유의 리듬감으로 춤을 추게도 하는 시였다. 도통 눈치란 걸 볼 줄 모르는 천진 속의 시였다. 근육질의 단문으로, 할 말은 다 하고 보는 시였다. 무엇보다 '내'가 있는 시였다.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였다. 시라는 그 어떤 강박 속에 도통 웅크려본 적이 없는 시였다. 어쨌거나 읽는 이들을 환히 웃게 하는 시였다. 웃는 우리로 하여금 저마다 예쁜 얼굴을 가져보게도 만드는 시였다. 그 어떤 이견 없이 심사위원 모두의 의견이 한데 모아진 데서 오는 즐거운 불안 말고는 아낄 박수와 격려가 없는 시였다. 앞으로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의 유쾌한 행보를 설렘으로 좇아볼 예정이다.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박상순・손택수・김민정 시인
신작 시 1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울기 좋은 때다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한 번의 발걸음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기분과의 타협 끝에 5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좁은 보폭으로 아껴가며 걷는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데리고 비를 떠밀것이다
걷다가
발을 지키는 하얀 흔적과 같은 개에게
엄살만 담긴 지갑을 줘 버린다
엄살로 한 끼 정도는 사 먹을 수 있으니까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검은 돌들이 듬성한 골목
골목이 기우는 대로 나는 흐른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미가 해놓은 첫 줄을 검사하다가
바쁘게 빠져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