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사 |
존재론적 고백
『솟대평론』 발행인 방귀희
나는 지난 2년 살생을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25년 동안 발간해오던 우리 나라 유일의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을 1991년 4월 29일 출생신고를 해놓고, 2015년 겨울 100호를 끝으로 2016년 6월 28일 폐간 신고를 했습니다. 내 손으로 탄생시킨 생명을 내 손으로 소멸시킨 죄인이 되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아프다는 소리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2016년 3월) 『솟대문학』이 문학적 가치가 풍부하다며 미국 명문대학인 스탠포드대학교 도서관에서 『솟대문학』 1~100호를 구입하여 장애인문학을 연구한다고 했을 때 정말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정부에서 지원을 끊은 것이 『솟대문학』이 무의미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니까요.
문학을 시작하는 장애문인들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최선의 글터로서 『솟대문학』의 문을 두들겼고, 중견 장애문인들은 『솟대문학』이 있어서 작품을 쓰며 ‘원하는 문예지에서 안실어주면 솟대문학에 보내야지’ 하는 차선의 글터로 보험을 들어둔 기분이었는데 이제 그런 최선과 차선의 문학 진로가 막혀버린 것에 대한 원망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2016년 10월 국정농단사건으로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과정에서 블랙리스트 사건이 드러나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나 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을 무렵, 2017년 1월 13일 경향신문에 ‘방귀희는 보수정부 국정운영철학과 함께 할 수 없는 좌파성향의 인물로 보고된 문건이 나왔다’는 기사가 실렸고, 열흘 후인 1월23일 동아일보에 ‘방귀희를 특검에서는 최씨 주변 인물들의 이권 개입에 방해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더 자세한 내용이 알려졌습니다.
신문에서 읽은 활자와는 달리 2017년 2월 15일 kbs 9시 뉴스에서 고영태 녹취록에 ‘좌파 걔 종이 한 장이면 날라가’ 하며 방귀희란 이름이 선명한 목소리로 나오자 살생죄의 진범이 밝혀진 기분이었습니다.
나의 전 생애를 걸고 한 도전은 보기 좋게 거부당했고, 평창장애인올림픽 작가 일을 하다가도 ‘장관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며 쫓겨났던 것은 나 개인의 일이니 나 혼자서 감당하면 되지만 발행인이 방귀희라는 것 때문에 『솟대문학』이 철퇴를 맞고, 회장이 방귀희라는 것 때문에 (사)한국장애예술인협회 응모사업이 정부 지원 사업에서 싹 배제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기를 2년 6개월...그래도 그 시절을 버티었기에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희망을 갖고 몸을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예술계의 지원을 제한하는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경악스러운데, 그 블랙리스트에 장애예술인도 포함되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장애인문화예술의 숨통을 조였다는 것은 생존권을 위협한 야만적 악행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약자의 약함을 이용해서 마음껏 짓밟고 있는 현실을 바로잡지 않으면 약자 중의 약자인 장애인은 평생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겠다는 판단에 1만 장애예술인 더 나아가 450만 장애인의 생존권 확보를 위하여 이번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과 진솔한 사과, 그리고 장애인문화예술정책 마련에 대한 책임 있는 약속을 촉구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솟대평론』 창간입니다. 솟대문학을 다시 발간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시겠지만 단순한 장애문인의 글터를 넘어 이제부터 제대로 장애인문학을 평가해서 장애인문학의 가치를 드높여야 솟대문학이 발전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원로시인 구상선생님이 넉넉지 못하신 살림 속에서도 솟대문학 작가들을 위해 구상솟대문학상 상금으로 2억원을 기증하고 소천하셨습니다. 『솟대문학』 없이 구상솟대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할 수가 없어서 2016년 한해는 쉬고, 올해 다시 구상솟대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고 나니 구상선생님에 대한 죄스러움도 덜어집니다.
『솟대평론』을 구상한 것은 10년도 더 되었습니다. 『솟대문학』을 발간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문단에서, 평론 장르에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리두기’였습니다. 장애인들이 문학 활동을 하는 것을 칭찬해주기는 하지만 문학으로 받아들여 평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솟대문학』은 우리들만의 글잔치가 되어 점점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한 것이 장애인문학 평론이었습니다. 『솟대문학』의 코너로 넣기도 했지만 비싼 원고료 문제와 장애인문학에 관심을 보이는 평론가를 찾지 못해 몇 차례 시도 후 슬그머니 평론 코너를 빼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솟대평론』을 시작하며 소설 평론의 김종회 교수님과 시 평론의 허혜정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시어 우리 문단의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을 모두 동참하여 어려움 없이 창간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한 기자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솟대평론, 창간 소식 들었습니다. 솟대문학을 복간시켜준 건가요?”
“누가 복간을 시켜줘요?”
“블랙리스트로 폐간됐던 문예지들이 다시 복간되고 있잖아요.”
기자의 말에 허겁지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2017년 문예지발간지원사업 공고’가 떠있었습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공고 내용을 살펴보니 이런 항목에서 숨이 탁 막혔습니다.
‘문예지 발간 경비 중 수록 작품에 대한 원고료 지원’
문예지 사업비의 원고료만 지원해준다는 것은 거처할 집이 없는 사람에게 쾌적하게 살 수 있도록 살림살이를 마련해주는 격입니다. 어느 정도 기초가 있는 문예지는 원고료 부담만 덜어도 책을 발간할 수 있지만 장애인문예지는 기초가 없기 때문에 그런 지원제도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고료와 제작비 지원을 각각 다른 사업에서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나라의 모든 지원제도는 한사업에 한번의 지원만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해당이 되지 않는 지원제도임에 다시 한번 실망을 하며 『솟대평론』에 대한 다짐을 더욱 굳건히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문학은 『솟대평론』을 통해 그 진가가 드러날 것입니다. 『솟대평론』은 장애인문학이 하류 문학이 아니라 독특한 경험문학으로 인간 존재론에 대한 고백이라는 사실을 전할 것입니다. 장애인문학은 『솟대평론』으로 더욱 활발한 담론이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2017년 9월
발행인 방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