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을 꿈꾸다
― 김순영
나는 가끔 불륜을 꿈꾼다
넓디넓은 밭고랑에서 하늘 한 번 쳐다보며 허리 펴는
수염 텁수룩한 사내의 그 맑은 눈빛과
투박한 손 언저리에 간간히 굳은 살 박혀
꺼끌꺼끌한 세상 꼭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는 속 넓은 사내와
리프트 언저리에 서성이다 손톱밑에 기름때가
지워지지 않은 사내의 따뜻함과
술집 모퉁이에 서서 거품 많은 맥주 한잔을
거침없이 들이키는 배포 큰 사내와
세상 이야기 안주삼아 내일의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그런 사내와
아무 일 없이 하룻밤을 새워도 좋겠다는
빈 껍데기 같은 생각을 하면서
불륜을 꿈꾸고 싶은 것이다
끼리끼리라는 말이 얼마나 행복하고 끈끈한 사랑인지
남몰래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책임진다는 말 허투루 하지 않는
그런 사내와 만나고 싶은 것이다
‘불륜(不倫)’이란 사전적으로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데가 있다는 뜻이지만 주로 ‘결혼한 남녀가 자신의 배우자 이외의 다른 사람과 정서적이고 육체적 관계를 갖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경우 ‘간통죄(姦通罪)’로 처벌을 했는데 지난 2015년 2월에 헌법 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 물론 간통을 한 사실만으로는 처벌을 받지 않지만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한 언론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불륜공화국이라고 한다. 혹자는 여권의 신장 탓으로 돌리지만 그보다는 성에 대한 인식이 개방되면서 혼전관계 혹은 처녀성이나 동정 같은 의미가 퇴색되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애인’이 성관계를 유지하는 사이를 뜻하는 말로 변하고 급기야는 ‘섹스파트너’란 말까지 등장할 정도로 소위 불륜이 난무하고 있다. 기혼자라 하더라도 애인 하나 없으면 장애인이란 말까지 우스갯소리가 나올 지경이니 어쩌면 불륜공화국이란 말이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순영의 시 <불륜을 꿈꾸다>에서는 화자가 첫 행부터 ‘나는 가끔 불륜을 꿈꾼다’며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럼 어떤 상대를 원할까. 대부분의 기혼자들은 결혼하여 아이 낳고 함께 살고 있는 아내(남편)와는 다른 상대를 찾는단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사는 아내(남편)와 비슷한 사람이라면 그 호감도는 크지 않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부부관계 없이 그냥 함께 사는 부부들 - 흔히 말하는 ‘섹스리스’ 부부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결혼생활의 기간이 오랠수록 상대에 대한 성적 호기심은 사라진다고 하니, 아내(남편)와는 다른 상대에게서 더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화자의 말을 따라가 보자. 시 속 화자가 원하는 상대는, 그럴 듯한 관형구들이 붙어 있지만 요약하자면 야성적인 사내, 속 넓은 사내, 따뜻한 사내, 배포 큰 사내 그리고 희망이 있는 사내이다. 화자는 이런 사내들과 ‘아무 일 없이 하룻밤을 새워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불륜을 꿈꾸고 싶은 것이’라면서도 그런 생각이 ‘빈 껍데기 같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 생각만 그렇지 실제로는 글자 그대로의 ‘불륜’을 저지르지 못할 화자이다.
그런데 ‘끼리끼리라는 말이 얼마나 행복하고 끈끈한 사랑인지 / 남몰래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다고 한다. 화자는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자신을 가리켜 ‘끼리끼리’라고 한다. 소위 유유상종(類類相從)인데 그렇다면 화자는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사내들과 어울릴 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로 생각하는 것이리라. 하긴 요조숙녀는 군자의 짝(窈窕淑女 君子好逑)이라 했던가. 군자의 짝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 자신을 요조숙녀라 자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마지막 말이 더 재미있다. 어쩌면 핵심이기도 할 것이다. 그 사내들이라 하더라도 결코 ‘책임진다는 말 허투루 하지 않는’ 사내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처녀 총각이 만나 육체관계를 가지면 남자가 여자를 ‘책임진다’는 말을 했다. 이는 결혼하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책임진다는 말 허투루 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일까. 결혼 혹은 가정이라는 속박이나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화자는 불륜을 ‘꿈꾼다’고 했다가 중간에 ‘꿈꾸고 싶은 것이다’고 말을 바꾼다. 그리고는 ‘끼리끼리라는 말’을 ‘남몰래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고 하더니 마지막에는 그냥 ‘그런 사내와 만나고 싶은 것이다’고 한다. 처음에는 당당하게 불륜을 꿈꾼다던 화자가 마지막에는 단순히 만나고 싶다고만 한다. 무슨 말일까. 바로 화자가 말하는 ‘불륜’이 글자 그대로 혹은 사전적인 의미로서의 ‘불륜’이나 간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더 간절하게 만나고 싶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불륜을 꿈꾼다’는 화자의 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남성성이 점차 약화되는 시대에 여자들이 원하는 남성성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화자가 ‘불륜’이란 말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진정한 만남일 수도 있다. ‘끼리끼리’란 말에 나오듯이 서로 어울릴만한 상대, 흔히 말하는 격이 맞는 상대와의 만남과 교류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만남으로서의 ‘불륜’이란 단지 글자 그대로 혹은 사전적 의미라 할 ‘섹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