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詩 (978)
감자의 이력
― 강동수
생전에 어머니가 가꾸었던 앞밭에서
감자를 캔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싹을 틔우던 어린것들
주인을 잃고 시들어진 줄기를 걷어낸다
호미가 지나갈 때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어머니의 세월
감자도 이력이 있어 모양을 갖추었다
작은 근심 큰 근심이 같이 매달려 나온다
가끔 검게 타들어간 어머니의 가슴이 세상을 향해
얼굴을 내민다
암덩이가 몸 속에서 자라듯이
해를 보기 전 알 수 없는 감자의 이력
어둠을 안고 땅거미가 몰려올 때까지
눈물같은 세월을 캔다.
‘자주 꽃 핀 건 / 자주 감자’이고 ‘하얀 꽃 핀 건 / 하얀 감자’라고, 이는 ‘파보나마나’ 알 수 있다고 권태응 시인이 동시로 밝혀놓았지만 사실 감자의 색깔만 알 수 있을 뿐, 감자꽃이나 잎만 보고 감자알이 얼마나 굵은지는 농부도 알 수 없다. 땅 속에서 뿌리로 자라는 감자는 파 보기 전에는 얼마나 잘 영글었는지, 큰지 작은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흔히 감자잎이 무성하면 알이 잘다고는 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강동수의 시 <감자의 이력>에는 감자를 캐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그 감자를 심은 사람은 어머니이지만 감자를 캘 무렵에는 어머니가 안계신다. 시 속 내용으로 보아 감자를 심고 싹이 올라오고 한창 자랄 무렵 어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신 모양이다. 그러니 ‘생전에 어머니가 가꾸었던 앞밭에서 / 감자를 캔다’고 한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싹을 틔우던 어린것들’은 화자의 눈에 ‘주인을 잃고 시들어진’처럼 보인다. 하긴 식물이라고 감정이 없겠는가. 늘 보살펴주던 주인이 안보이니 시들만도 할 것이다. 화자는 그런 줄기를 걷어내고 감자를 캔다.
‘호미가 지나갈 때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감자들 - 화자는 그 감자들을 ‘어머니의 세월’이라고 한다. 즉 화자는 호미질에 땅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감자들은 바로 ‘어머니의 세월’을 담고 있다고 인식한다. 그런데 ‘감자도 이력이 있어 모양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 크기가 제 각각이리라. 그러니 ‘작은 근심 큰 근심이 같이 매달려 나온다’지 않는가. 여기서 화자는 ‘가끔 검게 타들어간 어머니의 가슴이 세상을 향해 / 얼굴을 내민다’고 한다. ‘검게 타들어간’ 감자알 - 바로 땅 속에서 병충해로 혹은 다른 이유로 검게 썩어 버린, 먹지 못할 감자알이다. 화자는 이를 어머니의 가슴이 검게 타들어간 모습으로 인식한다. 호미로 땅을 훑기 전에는 몰랐던 일이다. 그러니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암덩이가 몸 속에서 자라듯이 / 해를 보기 전 알 수 없는 감자의 이력’이라지 않는가.
그렇게 화자는 ‘어둠을 안고 땅거미가 몰려올 때까지 / 눈물같은 세월을 캔’단다. ‘눈물같은 세월’ - 바로 어머니의 세월이지 않겠는가. 어머니가 심은 감자, 싹이 나고 잎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직접 돌보셨던 감자밭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감자가 얼마나 영글었는지는 알지 못한 채 암으로 돌아가셨다. 주인이 가고 없는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는 화자. 호미질에 올라오는 감자알들은 크거나 작거나 모두 어머니의 세월이다. 개중에는 썩은 것도 올라온다. 바로 검게 타들어간 어머니의 가슴이리라. 감자알이 굵건 잘건 아니 썩은 것이라도 모두가 어머니의 세월이 담긴 것들이요, 어머니의 큰 근심 작은 근심 그리고 때로는 ‘검게 타들어간’ 어머니의 ‘눈물같은 세월’이 그대로 배어 있다. 화자는 지금 감자를 캐며 캐낸 감자알에서 그 알에 담겨 있는 ‘어머니의 세월’을 읽고 있다.
시 제목이 ‘감자의 이력’이다. 이력 - 바로 어머니의 큰 근심 작은 근심 그리고 검게 타들어간 가슴, 바로 ‘어머니의 세월’이다. 시 속에 미사여구를 쓴 것도 아니요 특별히 남다른 상징과 비유도 없다. 그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비유에 진솔한 묘사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시를 읽고 나면 오히려 그런 진술들에서 어느 비유나 상징보다 더 큰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아, 어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