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헌시
1. 처음 치욕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어서
차가운 냇물에 깊숙한 곳 닦았네
징그럽게 꿈틀 거리는 치욕을
바람이 무심하게 묵인한 것 미워서
달의 증언을 저장해 두려는 태도로
옥타브 높은 통곡을 안으로 안으로 삼켰네
물은 평생 뒤척이는 생각을 안고 흐를 것이네
나는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감시 다음에 악몽이
슬픔 다음에 분노가 번식하는 것을 방치할 것이네
몸속에선 절벽만이 우후죽순 자라나고
가장 위험한 높이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네
태어날 때 이미 공포가 결정되어 있었던 것
상현이 하현으로 자세를 바꾸기 전에
상처의 뿌리가 한 뼘 더 자라기 전에
참혹 속에서 각자도생을 택해야 하네
2. 내 안의 짐승
국적불명의 까마귀가 날아와 울고 있네
철저히 혼자가 됐을 때
처음으로 자신 안의 짐승을 발견한 것처럼
얼음과 서리로 가득 찬 언어로
나, 내 안의 짐승을 까마귀에게 고백하고 있네
숨죽이는 데 놀랄 만큼 익숙한 비참과
문소리만 들려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불안
어둠도 태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는 짐승의 방언으로부터 배웠네
주석이 불가능한 폭력과 욕설은 얼마나 치밀한 비열인가
악몽을 꿀 때마저 이를 악물고
패배의 뼈를 뚝뚝 분지르며
오장육부를 쥐어짜던 시간을 겨우 발음하고 있네
손가락을 깨물어
유서마저 쓸 수 없어서
목 메이게 소화되지 않는 지옥을
계속해서 삼키고 있네
짐승은 내내 나를 떠나지 않고….
3. 거울 없는 방
우리를 제대로 비춰주는 거울은 우리들일 뿐이었네
그러니 거울은 얼마나 달아나고 싶었겠나
저곳과 이곳이 모두 감옥 같아서
민낯의 이야기가 난무한 게 치가 떨려서
돌멩이처럼 웅크린 채
침묵에 파묻힌 채
할딱거리던 짐승을 달래보려고
미치도록 파국을 참았을 것이네
거울은 원래 대화보다 독백을 더 편애했네
슬픔이 고인 후 닫아버린 우물을 닮았네
감정도 감각도 없는 눈동자 속 눈동자
알몸으로 온 몸으로 거울을 추궁했네
불가촉의 감각으로
흉터와 속울음을 발설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네
다음 생에 반드시 늑대로 태어나면
송곳니 수십 개 가진
야성을 가질 수만 있다면
비난과 방조와 암묵을 물어뜯을 것이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위선들의 숨통을 조인 후
숨 한 번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거울 속에 던져놓을 것이네
4. 이명
소녀를 호명하는 것이
흉문을 빠져나온 흔적들뿐이라서
밤마다 대인기피증이 도지고 있네
죽은 자의 목소리가 이명으로 떠도네
귓속이 아니라 심장 안쪽이 분명하네
너 만은 살아야 해, 살아서 증언해야 해
목소리의 성격은 또렷하고 분명하네
먹먹한 혼잣말들로 가득 찬 비참은
얼마나 서글픈 본능인가
울음의 방향을 끝없이 누설하고 싶네
그날로부터 후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들리게
전설이 되어 번져나가고 싶네
거대한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아도
목소리만은 살아서 멀리멀리 흩어지고 싶네
5. 어떤 표본
우리는 어느새 표본이 되어 있었네
아파도 소리치지 못하는 자의 표본
상처를 감추고도 괜찮은 척 해야 하는
증상을 표출하면 염치없는 자가 되는 표본
표본을 유지하려면 방부제가 필요한데
어떤 이들은 썩어 문드러지라고 비난을 퍼부었네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언제까지 집요하게 얽매여서 살 거냐고
감출 건 가리고 있어야 여자라고
잔인하게 타협을 자꾸 부추겼네
화장이 좋을지
순장이 좋을지
풍장이 좋을지 한 번도 고민 한적 없었네
만약 나를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면
투명한 유리관 안쪽이 내 무덤일 것이네
박물관의 이름은 꼭 증오박물관으로 해주게
수천 년 살아있는 미라가 되어서
분노의 표본으로 굳어져서
위증의 눈동자들을 향해 눈감지 않을 것이네
6. 미리 남기는 유언
잘 있게나, 세상 눈치 보지 않고 죽겠네
염천 아래 데인 것이 어린 싹의 꿈이었으니
생의 자리와 흔(痕)의 자리에서
한이 되어 조금만 더 맴돌다가 가겠네
혼자 눈물
혼자 밥상
혼자 질문
혼자 대답
백 년 동안 멈추지 않던 목소리를 이젠 감출 것이네
용서가 다 빠져나간 시절에
추모하는 것마저 사치라고 여긴 곳곳에
흙의 살이 닿는 즉시 부릅뜬 내 눈 내어주겠네
땡볕 아래 말라죽은 지렁이의 한 줄 유언처럼
육탈이 된 후 모든 것 다 잊겠네
나 같은 사람이 또다시
이 세상에서
이 지옥에서 생겨나지 않는다면….
하린 시인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 데뷔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학위
중앙대, 한경대, 광주대, 협성대, 서울시민대, 열린시학아카데미, 고양예고 등에서 글쓰기 및 시 창작 강의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과 "서민생존헌장",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작법서 "시클" 출간
"시클"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 사업 선정
2011년 청마문학상 신인상, 제1회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 2016년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기록사진 위로 떨어지는 것, 기혁 시인>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
1. 처음 치욕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어서
차가운 냇물에 깊숙한 곳 닦았네
징그럽게 꿈틀 거리는 치욕을
바람이 무심하게 묵인한 것 미워서
달의 증언을 저장해 두려는 태도로
옥타브 높은 통곡을 안으로 안으로 삼켰네
물은 평생 뒤척이는 생각을 안고 흐를 것이네
나는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감시 다음에 악몽이
슬픔 다음에 분노가 번식하는 것을 방치할 것이네
몸속에선 절벽만이 우후죽순 자라나고
가장 위험한 높이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네
태어날 때 이미 공포가 결정되어 있었던 것
상현이 하현으로 자세를 바꾸기 전에
상처의 뿌리가 한 뼘 더 자라기 전에
참혹 속에서 각자도생을 택해야 하네
2. 내 안의 짐승
국적불명의 까마귀가 날아와 울고 있네
철저히 혼자가 됐을 때
처음으로 자신 안의 짐승을 발견한 것처럼
얼음과 서리로 가득 찬 언어로
나, 내 안의 짐승을 까마귀에게 고백하고 있네
숨죽이는 데 놀랄 만큼 익숙한 비참과
문소리만 들려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불안
어둠도 태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는 짐승의 방언으로부터 배웠네
주석이 불가능한 폭력과 욕설은 얼마나 치밀한 비열인가
악몽을 꿀 때마저 이를 악물고
패배의 뼈를 뚝뚝 분지르며
오장육부를 쥐어짜던 시간을 겨우 발음하고 있네
손가락을 깨물어
유서마저 쓸 수 없어서
목 메이게 소화되지 않는 지옥을
계속해서 삼키고 있네
짐승은 내내 나를 떠나지 않고….
3. 거울 없는 방
우리를 제대로 비춰주는 거울은 우리들일 뿐이었네
그러니 거울은 얼마나 달아나고 싶었겠나
저곳과 이곳이 모두 감옥 같아서
민낯의 이야기가 난무한 게 치가 떨려서
돌멩이처럼 웅크린 채
침묵에 파묻힌 채
할딱거리던 짐승을 달래보려고
미치도록 파국을 참았을 것이네
거울은 원래 대화보다 독백을 더 편애했네
슬픔이 고인 후 닫아버린 우물을 닮았네
감정도 감각도 없는 눈동자 속 눈동자
알몸으로 온 몸으로 거울을 추궁했네
불가촉의 감각으로
흉터와 속울음을 발설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네
다음 생에 반드시 늑대로 태어나면
송곳니 수십 개 가진
야성을 가질 수만 있다면
비난과 방조와 암묵을 물어뜯을 것이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위선들의 숨통을 조인 후
숨 한 번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거울 속에 던져놓을 것이네
4. 이명
소녀를 호명하는 것이
흉문을 빠져나온 흔적들뿐이라서
밤마다 대인기피증이 도지고 있네
죽은 자의 목소리가 이명으로 떠도네
귓속이 아니라 심장 안쪽이 분명하네
너 만은 살아야 해, 살아서 증언해야 해
목소리의 성격은 또렷하고 분명하네
먹먹한 혼잣말들로 가득 찬 비참은
얼마나 서글픈 본능인가
울음의 방향을 끝없이 누설하고 싶네
그날로부터 후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들리게
전설이 되어 번져나가고 싶네
거대한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아도
목소리만은 살아서 멀리멀리 흩어지고 싶네
5. 어떤 표본
우리는 어느새 표본이 되어 있었네
아파도 소리치지 못하는 자의 표본
상처를 감추고도 괜찮은 척 해야 하는
증상을 표출하면 염치없는 자가 되는 표본
표본을 유지하려면 방부제가 필요한데
어떤 이들은 썩어 문드러지라고 비난을 퍼부었네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언제까지 집요하게 얽매여서 살 거냐고
감출 건 가리고 있어야 여자라고
잔인하게 타협을 자꾸 부추겼네
화장이 좋을지
순장이 좋을지
풍장이 좋을지 한 번도 고민 한적 없었네
만약 나를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면
투명한 유리관 안쪽이 내 무덤일 것이네
박물관의 이름은 꼭 증오박물관으로 해주게
수천 년 살아있는 미라가 되어서
분노의 표본으로 굳어져서
위증의 눈동자들을 향해 눈감지 않을 것이네
6. 미리 남기는 유언
잘 있게나, 세상 눈치 보지 않고 죽겠네
염천 아래 데인 것이 어린 싹의 꿈이었으니
생의 자리와 흔(痕)의 자리에서
한이 되어 조금만 더 맴돌다가 가겠네
혼자 눈물
혼자 밥상
혼자 질문
혼자 대답
백 년 동안 멈추지 않던 목소리를 이젠 감출 것이네
용서가 다 빠져나간 시절에
추모하는 것마저 사치라고 여긴 곳곳에
흙의 살이 닿는 즉시 부릅뜬 내 눈 내어주겠네
땡볕 아래 말라죽은 지렁이의 한 줄 유언처럼
육탈이 된 후 모든 것 다 잊겠네
나 같은 사람이 또다시
이 세상에서
이 지옥에서 생겨나지 않는다면….
하린 시인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 데뷔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학위
중앙대, 한경대, 광주대, 협성대, 서울시민대, 열린시학아카데미, 고양예고 등에서 글쓰기 및 시 창작 강의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과 "서민생존헌장",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작법서 "시클" 출간
"시클"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 사업 선정
2011년 청마문학상 신인상, 제1회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 2016년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기록사진 위로 떨어지는 것, 기혁 시인>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