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같은 가을이/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시 읽기 200> 개같은 가을이/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란다. 시를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라 믿고서 낙천적인 언어습관에 길들여진 이들에겐 참으로 난폭하고 도발적이며 냉소적인 직유다.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라고 했던 시인. ‘세월은 길고 긴 함정일 뿐이며 오직 슬퍼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며 서슴없이 저주받은 운명을 말하던 시인. ‘내가 살아있다는 건 루머’라고 했던 그가 지독한 절망의 끝에서 본 가을은 신산하기 그지없다.
건조해져 가는 산과 차가워지는 바람의 우울, 낙엽의 조락처럼 쓸쓸한 풍경들이 이유 없는 고통으로 체험될 때 가을은 더 이상 아름다움으로 칭송되지 않는다.
깡마른 풍경으로 사물들은 방치되고 몸과 마음의 운신 또한 덩달아 힘겨우리라. 누구도 연결해내지 못하는 언어만이 꿈과 현실에서 떠나간 애인들을 기억할 뿐. 평론가 김현은 일찍이 최승자의 시를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라고 했다.
‘말 오줌 냄새’를 풍기며 폐수로 고이는 가을이란 막다른 현실. 그 끝에서 황혼을 업은 강물이 마비된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찾아가는 바다. 그 바다가 기어이 자신을 죽이고 말 것을 믿으므로 더없이 충만한 고통 속에서 묻는다.
여기가 어디냐고. 언제쯤 이 불구의 마음과 지류의 삶이 무한의 바다에서 죽음처럼 고요해질 수 있느냐고. 마음에 추를 달아 끝없이 추락게 하는 ‘개 같은 가을’에 나는 무엇이냐고. 참을 수 없는 아픔이 구차하게 번져가는 ‘매독 같은’ 저주의 가을로 한달음에 달려가지만 그 풍경 다 받아내지 못하는 나는 도대체 뭐냐고. 이 시대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개처럼 쳐들어온 가을을 맞아야 하나. 지난 시대의 추문들에 일일이 분노하기에도 지쳐 삶은 허무로 깊게 패고 있다.
수확할 게 없는 이들에겐 절망이 낙엽처럼 쌓일 것이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철저한 소외의 계절이 될 것이다. 풍경은 아름답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밝게 웃을 것이나 몸과 마음의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겐 ‘개 같은 가을’이다.
그의 환멸에 대처하는 방식은 최영미 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그녀는 한때 독거기초생활수급 대상자였다. 오직 자기 모욕과 자기 부정과 자기 훼손의 방식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허무의 사제’ 최승자 시인은 세상을 혹독하게 앓으며 시를 과격하게 써댔지만 시로는 ‘밥벌이를 할 수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일찌감치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했던 그녀가 이 가을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두망찰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걸 바라보는 일밖에는.
2, 누구를 통해 말하는가 ─화자와 퍼소나
서정시는 주관적이고 고백적인 장르이기 때문에 시적 화자는 흔히 시인과 동일시되곤 합니다. 그러나 시 속의 ‘나’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재창조된 ‘나’입니다. 시인의 생각을 대변해 주거나 시적 대상을 효과적으로 잔달하기 위해 새롭게 창조해 낸 목소리인 것이지요.
시적 화자와 비슷한 개념으로 퍼소나, 시적 자아, 서정적 자아, 서술자, 시적 주체, 서정적 주체 등이 있는데, 그 맥락과 의미가 조금씩 다릅니다. 최근에는 한 편의시에 여러 화자가 공존하거나 화자의 정체가 불분명한 시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 속의 다양한 목소리를 포괄하는 새로운 개념으로‘화자’ 대신 ‘주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화자는 일반적으로 ‘퍼소나persona’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연극에서 배우의 가면을 의미하는 ‘퍼소난도personando’에서 유래했지요. 배우가 가면을 통해 극적인 개성을 부각하듯이 시에서도 어떤 화자를 내세우느냐에 따라 시의 분위기와 방향이 결정됩니다. 시인과 거리가 먼 퍼소나를 창조할수록 그 시의 연극적이고 가공적인 성격은 강해지지요. 또한 화자의 성격에 따라 시점의 선택, 서술어의 시제, 사용하는 어휘, 어조와 톤 등도 전반적으로 달라집니다.
따라서 시를 읽을 때 시적 화자가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가장 먼저 살펴야 합니다. 소설가가 인물에 대해 탐구하듯이, 시를 쓸 때도 자신이 설정한 화자의 개성을 충분히 가다듬어야 하고, 시 전체가 그 인물의 시점에서 발화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시의 화자를 독립된 퍼소나로 이해한다는 것은 시가 일정한 예술적 형식을 통해 완성된 ‘허구’라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가 화자를 중심으로 구조화된 담화(언술)라고 할 때 화자가 있으면 당연히 그 말을 듣는 청자도 있겠지요. 물론 모든 시에 화자와 청자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자와 청자가 모두 드러나 있는 경우, 화자와 청자가 모두 드러나 있지 않은 경우, 화자만 드러나 있는 경우, 청자만 드러나 있는 경우 등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화자와 청자가 뚜력하게 드러나지 않은 경우에도 시인 뒤에는 함축적(내포적) 시인이, 독자 뒤에는 함축적(내포적) 독자가 각각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 편의 시를 쓰고 읽는 일이란 다음과 같이 시인과 독자가 세 겹의 목소리를 주고 받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함축적 시인(현상적 화자→현상적 청자)→함축적 독자〕→독자
여기서 ( ) 안의 현상적 화자와 현상적 청자는 텍스트 문면에 나타나 있는 화자와 청자를 말합니다. 시적 상황이 단순하고 인물의 성격이 분명할수록 현상적 화자와 현상적 청자를 파악하기가 비교적 수월하겠지요. 하지만 화자와 청자가 복합적이고 모호한 경우에는 그 함축적(내포적) 시인에 대해 좀 더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축적 시인은 실제 시인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경우부터 상당히 상반되거나 위악적인 경우까지 다양합니다.
그럼, 실제 시인과 가장 가까운 화자가 등자앟는 시부터 살펴 볼까요. 다음은 함민복의 「긍정적인 밥」인데, 시인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으니 시인과 화자의 거리가 아주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긍적적인 밥」 전문
시인은 시가 지닌 경제저 가치와 정신적 가치를 비교적 쉽고 진솔하게 풀어 가고 있는데요. 1연에서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라는 상품 가치는 쌀 두 말에 해당하지만 ‘따뜻한 밥’을 환기함으로써 새로운 교환 가치로 전환됩니다. 2연에서는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라는 상품 가치가 ‘국밥 한 그릇’으로, 3연에서는 시집 한 권의인세가 삼백 원의 가치가 ‘굵은 소금 한 됫박’으로 각각 전환됩니다. 박하고 헐한 대가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시를 계속 쓸 수 있는 동력은 바로 시가 따뜻한 밥과 국밥, 소금처럼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썩지 않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믿음 때문이지요. 이런 낙관적인 태도는 「긍적적인 밥」이라는 제목뿐 아니라 각 연의 마지막에 반복되는 ‘─네’라는 어미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시적 대상이 되는 인물을 직접 화자로 등장시켜 개성적 화법을 보여 주는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시인이 인물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인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현장감이나 실감을 높이는 방법이지요. 제3의 화자를 내세울 경우, 특히 고전이나 신화, 다른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잘 알려진 인물일 경우, 독자는 화자의 목소리를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설정은 부연 설명 없이도 시적 상황을 전달할 수 있고, 원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변형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오ㅅ날, 처음 만나든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든
그 무성하고 푸르든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서정주, 「춘향유문(春香遺文)─춘향의 말 3」 부분
그런데 나는 갇혀 있어요 옥 속이에요
버드나무 천사만사(千絲萬絲)로 늘어진
푸른 가지 사이에서 우는 황금조(黃金鳥)는
내 마음 설레는 이랑 눈부신 이랑 이랑
누비면서 나는 새
그런데 나는 지금 옥에 갇혀 있어요
나는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지금 갇혀 있어요 옥 속이에요
그런데 오 나는 사랑하고 있어요
─전봉건, 「춘향 연가(春香戀歌)」 부분
이 두 편의 시는 모두 춘향을 시적 화자로 삼고 있지만, 사랑에 관한 주제 의식이나 정서적 톤은 각기 다릅니다. 서정주의 「춘향유문」이 도련님을 청자로 하면서 수 사람의 운명적 만남과 사랑의 영원성을 피력하고 있다면, 전봉건의 「춘향 연가」는 뚜렷한 청자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춘향의 독백으로 사랑을 이룰 수 없는 비극성이 더 두드러집니다. 이처럼 같은 화자라 하더라도 구체적인 시적 상황에 따라 메시지나 분위기는 아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춘향전」의 내용은 알고 있는 독자라면 두 시 모두 어렵지 않게 춘향에게 감정 이입해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익명의 인물이나 가상의 인물을 화자로 삼는 경우를 살펴볼까요. 이 경우는 인물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나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다음은 최두석의 「한장수」로 쿠니 사격장에서 아내를 잃고 그곳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남자를 시적 화자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 인물의 기본적인 상황을 제목 다음에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한 장수
─고온리 앞바다 감배바위에 붙은 귤을 따다가 등줄기에 폭탄을 맞아 죽은 아낙이 있었다. 그 여자의 남편 한장수 씨는 그 대가로 쿠니 사격장 경비원으로 취직하여 이제까지 그 일을 하고 있다.
가만있자, 그게 벌써 이십오 년 되얐구만,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해, 사격장에서 염해 갖구 밤중에 공동묘지에 묻었어. 에미가 죽으니께시리 배속에 있는 거는 말할 거이 읎구 두 살백이 기집애두 따러 죽잖우, 나, 당최 정신읎었어. 걔 죽는지두 몰르구 술 먹으니…… 경비 스다 집에 오면 사는 거이 너무 구차스러, 진절머리 넌덜머리가 나, 그런니께 술 먹고 뻗어. 아츰에 정신 나면 새끼들 낯바닥이 뵈여. 그 낯바닥 보고 또 출근을 허는겨, 그냥저냥 숫제 속아 살았어. 요 동네 참새는 아마 귀먹었을겨. 폭력이 여란해두 용감허니 날러댕겨. 먹고 사는게 뭔지 참 아심아심해. 시방은 속 삭아서 그렇지. 독약두약이래니 세월이 약이 안 되겄나. 다른 건 다 쇡여도 팔자는 못쇡이더라구, 인저 팔자 탓이거니 생각허구 견뎌.
마치 다큐멘터리의 한 대목을 보는 것처럼, 한 장수라는 인물이 눈앞에서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십오 년 전 아내와 뱃속의 아기가 미군 부대의 폭탄에 희생당하고, 남은 세월을 그곳의 경비원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인물. 그 인물의 삶은 한국사의어두운 단면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그에 대해 목소리 높여 울분을 토로하거나 논리적으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구어체의 충청도 사투리와 거기에 어려 있는 체념적인 태도는 그야말로 역사의 희생자인 민중의 이미지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시는 지식인의 비판적인 진술보다 더 리얼하게 시대의 아픈 단면을 환기해 줍니다.
―나희덕, 『한 접시의 시』, 창비,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