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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어떻게 오는가 

시적 언어와 상상력

 

 

 

  셰익스피어는 그의 소네트에서 시인과 광인과 연인은 비슷한 부류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겠지요. 연인은 추녀의 얼굴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광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과 대화화며, 시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언어의 집을 지어 주려고 합니다. 영감이 시인에게 찾아올 때, 시인의 내면에 알 수 없는 움직임이나 이미지가 자리 잡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을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물론 시적 상상력(imagination)은 단순한 광기나 공상과는 다릅니다. 공상이 연상 작용에 의해 수많은 이미지들이 임의로 나열되거나 공존하는 상태라면, 상상력은 제1상상력과 제2상상력으로 구분하고, 시라는 복합적인 통일체는 제2상상력이 지닌 종합적인 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그런 점에서 시인은 연인이나 광인과 구별됩니다.


  ‘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선 시적인 것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보지요. 시적인 것은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지만 시인이 그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구체적인 의미나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시적인 것을 발견해서 거기에 일정한 형식과 언어를 부여했을 때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태어납니다. 만일 시적인 것을 화가가 발견해서 그림으로 그렸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시적인 회화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시적인 것은 시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만드시 시의 형태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를 읽을 때도 완성된 시의 형태나 표현 이전에 그것을 시로 성립하게 하는 포에지(poésie)가 무엇인지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는 언제 어떻게 오는가. 이 문장의 주어가 시인이 아니라 인 것은 시 또는 시적인 것 앞에서 시인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김춘수 시인은 시적인 상태를 들림이라는 말로 표현했지요. 여러분도 무엇인가에 흘리거나 들려본 경험이 있나요? 시적인 것이 찾아오는 순간이란 처음에는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이자 영혼에서 시작된 일종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시적인 것을 발견하고 그 놀라운 광휘에 사로잡혀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시인의 몸과 영혼이 감전되는 순간은 섬광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시인에게는 시적인 순간이나 대상을 향해 자신을 열고 집중하는 능력이나 노력이 요구됩니다. 사물과 제대로 스파크를 일으키지 않고서는 그 사물이 들려주는 말을 제대로 받아 적을 수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력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파블로 네루다, 부분

 

  파블로 네루다의 는 시가 찾아오는 미묘한 순간을 아주 섬세하게 포착해서 보여줍니다. 목소리도 침묵도 아닌 상태, 그 시간과 공간조차 정확히 짚어 낼 수 없는 존재…….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를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이 그 비밀을 해독해 가는 동안 시적인 것은 조금씩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시인은 우주적 기운에 휩싸여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느끼게 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의지와 지혜로 시적인 것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시적 상상력은 시인이 얼마나 선입견과 통념을 벗어나 대상을 대상 자체로 발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상상력(imagination)의 라틴어 어원인 ‘imago’는 오늘날 ‘image’ 해당하는 말입니다. 이에 따르면, ‘상상력이란 이미지를 만드어 내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죠. 한자로 풀어 보면 상상력想像力을 생각하는 힘을 뜻하는데, 이것은 코끼리를 본 적 없는 고대인들이 죽은 코끼리 뼈를 보고 그 살아 있는 형상을 그린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상상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거나 부재하는 것들에게 구체적인 형상(이미지)를 부여하고 살아 숨 쉬게 만든 능력입니다.

  테드 휴즈의 시 머리 속의 여우역시 네루다의 와 마찬가지로 시가 씌어지는 과정을 실감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차갑고 검은 눈처럼 섬세하게

한 마리 여우의 코가 잔가지와 잎을 건드린다:

두 눈이 한 움직임을 거든다. 그리하여 지금 마악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리고 또 그리고 또

 

흰 눈 속에 산뜻한 자국을 찍는다

나무들 사이에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절룩거리는

그림자가 그루터기 옆을 느릿느릿 지나간다 그리고

대담히도 공터로 나오고 있는 몸뚱아리의

움푹 들어간 공동(空洞) 속에서, 눈 하나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초록 하나가,

휘황하게, 골똘하게

제 일을 시작하고 있다

 

문득 여우의, 코를 찌르는 악취와 함께

그게 머리의 어두운 구멍으로 들어올 때까지,

창에는 여전히 별이 보이지 않는다: 시계는 똑딱거리고

글은 쓰여진다.

테드 휴즈, 머리 속의 여우부분

 

  여기서 테드 휴즈는 시상(詩想)살아 있는 여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우는 아주 섬세하고 의심이 많은 동물이어서, 잘못 서두르다간 놓쳐 버리기 십상이지요. 시적인 영감이란 살아 있는 동물처럼 민감하고 사라지기 쉽다는 점에서 적절한 비유라고 여겨집니다. 여우를 사로잡기 위해 시인은 오로지 침묵을 지키며 그것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립니다. “문득 여우의, 코를 지르는 악취와 함께/그게 머리의 어두운 구멍으로 들어올 때까지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지요. 이처럼 여우의 살아 있는 움직임에 온전히 사로잡히는 것이야말로 여우를 사로잡는 좋은 방법입니다. 이때의 기다림이란 수동적이지만 고도의 긴장을 필요로 하는 적극적 노력이기도 합니다.

테드 휴즈는 시작법에서 자신이 시적인 대상에 생각을 앉히는 법을 배운 것은 어린 시절 낚시질하면서였다고 말합니다. 물결 위에서 작은 찌가 움직이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지켜보는 일이 곧 시인으로서의 관찰력과 집중력을 길러 준 훈련이었다고 해요. 부단히 노력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시적 발견을 위해서는 우선 남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개성적인 방식으로 탐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연히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발견이라도 실은 그 사람이 집중해 온 관심이나 행동 방식이 낳은 필연적 결과에 가깝습니다. 시적 발견은 의식의 차원뿐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과 경험 등 삶의 총체가 결집되는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대상을 보고도 그것을 발견하고 해석하는 깊이와 각도가 다른 것은 관찰자의 내면이 지닌 총체적 역량과 용량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시적 발견을 위해 염두에 두어야할 또 하나의 조건은 대상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대상에 충분히 몰입한 뒤에는 다시 대상으로부터 빠져나와 비판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국 시적 긴장감은 몰입과 거리감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작품의 균형과 절제 역시 그런 거리 조절을 통해 얻어질 수 있습니다.


  한 편의 시가 하나의 발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하나의 발견은 그 이전의 다른 발견들과 자연스럽게 결합하게 되고, 그 결합이 풍부할수록 고도의 함축성을 지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충만한 발견은 이미 그것을 표현할 언어와 형식, 리듬 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시적인 발상은 좋은데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 능력이 부족하다고 한탄하지만, 실은 시적인 것과의 만남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시를 만나기 위해서는 빈약한 발상을 언어로 다듬느라 책상 앞에서 끙끙거릴 것이 아니라 문밖으로 걸어 나가 세상에 살아 숨 쉬는 것들을 만나야 합니다.

 

내 소리도 가끔은 쓸 만하지만

그보다 더 놓은 건

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

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 거야

무슨 길들은 소리 듣는 거보다는

냅다 한번 뛰어 보는 게 나을걸

뛰다가 넘어져 보고

넘어져서 피가 나 보는 게 훨씬 낫지

(중략)

어디 냇물에 가서 산 고기 한 마리를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걸

확실히 손에 쥐어 보란 말야

그나마 싱싱한 혼란이 나으니

야음을 틈타 참외 서리를 하든지

자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어

팔딱이는 심장 따뜻한 체온을

손바닥에 느껴 보란 말이지

그게 세계의 깊이이니

정현종, 시 창작 교실부분

 

시 창작 교실에서 시인이 들여주는 비법은 바로 이것입니다.“살아 시퍼런 소리를듣는 것,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걸/확실히 손에 쥐어보는 것이지요. 시인은 그것이 바로 세계의 깊이라고 말합니다. “싱싱한 혼란만이 우리의 영혼을 부추겨 시의 광휘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합니다.

 

나희덕, 한 접시의 시, 창비, 2012.


잘 익은 사과/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빰보다 더 차가운 한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살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순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믈오믈 잘도 잡수시네요.

 

 

<시 읽기 222> 잘 익은 사고/김혜순

 

   김혜순 시인은 잘 늙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이 시인의 가장 큰 딜레마이자 동시에 매력일지 모른다. 시인의 나이는 곧 통찰의 깊이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김혜순의 통찰은 나이를 먹지만 그녀의 언어는 여전히 탱글탱글하다.

 

  사실 "잘 익은 사과"는 얼핏 읽어보면 동시와 매우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네요, 나네요, 있네요, 잡수시네요"로 끝나는 문장의 종결어미도 그렇지만 연결되는 심상의 감각들도 그러하다.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청각'으로 시작한 첫째 연부터 네 번째까지는 '소리의 심상'이다. '치르르치르르'라는 의성어로 강조되는 소리의 심상들은 이후 겉으로 보면 자칫 심드렁해보일 만큼 차분하고 절제된 묘사들로 이어진다. 4연까지가 '청각'이라면 5연부터 8연까지는 촉각, 9연과 10연은 후각, 11연부터 마지막 연까지는 시각적 묘사로 연결되고 있다.

 

  여름 여치가 운다 는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가을 정미소를 지난다. 차가운 구름이 떠 있다. 그렇게 자전거는 골목 모퉁이를 돈다. 할머니가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있다. ‘잘 익은 사과은 이런 일상적인 풍경을 다채로운 감각의 성찬으로 펼쳐 놓고 있다.

 

  백 마리의 여치 울음 소리는 자전거의 바퀴 도는 소리, 정미소에서 나락 빻는 소리와 겹쳐진다. 처녀 엄마가 낳은 입양 가는 아가의 뺨은 구름의 차가움으로 전이되고, 그 구름은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로 확장된다. 고향 마을은 금세 큰 사과로 축소되고, 마을을 달리는 자전거 바퀴는 사과를 깎는 칼날 소리를 낸다. 자전거 바퀴가 둘글게 길을 깎아내고 그때마다 고향 마을만큼이나 큰 사과가 깎인다는 발상과 그 큰 사과를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파내 잇몸으로 오물오물 잡수신다는 발상은 사뭇 상징적이면서 동화적이다.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야금야금 파먹는 사과는 시간의 신이 돌리는 물레의 실타래에 비견할 만하다. 기발하면서도 유쾌하다. 아가, 처녀 엄마, 할머니로 숨가쁘게 이동하는 시간을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으로 정지 시켜 놓는 것도 흥미롭다.

차르르차르르 돌던 한 세월이 발갛게 잘 있었겠다. 누군가 고향 마을에서 그 한 세월을 잘 놀다 가겠다. 껍질이 홀라당 깎인 노르스름한 사과 속살 같았겠다. 군침 가득 돌았겠다.

 

  시인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바라본 일상의 풍경들을 시계의 물레처럼 '치르르치르르' 돌리며 아라크네가 되어 한 여성이 태어나 살아가는 여러 모습들을 직조해나간다. 그 순간 인생은 둥근 자전거 바퀴처럼 둥근 사과 한 알이 된다. 삶의 시간은 '아가, 처녀 엄마, 할머니'로 이어지고, 사각사각 사과를 깍아내듯 시인의 자전거 바퀴를 따라 함께 돌고 돌아 마침내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의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잇몸으로 오물오물"에서 마무리된다. 인생은 과연 잘 익은 사과 한 알이다. 비록 먹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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