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이미지의 시대라고 합니다. 넘쳐 나는 이미지들 속에서 ‘이미지image’라는 말만큼 다양한 의미를 지닌 말도 드물 것입니다. 감각적인 인상에서 추상적인 관념까지, 또는 가시적인 것에서 비가시적인 것까지 두루 포함될 수 있지요. 따라서 이미지라는 말을 어떤 층위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범주나 정의도 달라지게 됩니다.
‘이미지’를 우리말로는 ‘심상心象’, 곧 ‘마음의 그림’이라는 영국의 비평가 세실 데이루이스의 정의도 그와 비슷합니다. 심상은 일반적으로 감각적(묘사적) 심상, 상징적 심상으로 나누지요. 이 분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감각적이고 사실적 묘사뿐 아니라 비유나 상징 등의 관념적인 차원까지 포괄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는 대상의 재현인 동시에 주체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시에서 이미지의 역할은 시인의 관념을 육화된 형태로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진술(설명)하지 않고 대상을 우리 앞에 보여 준다”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진술(설명)하지 않고 대상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는 아이버 리처즈의 말처럼, 살아 있는 이미지란 시인이 감각을 통해 경험한 대상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재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형상화된 이미지는 논리적인 설명으로 대체하거나 환원하기 어렵지요. 이미지는 서로 대립되거나 모순되는 요소들을 함께 끌어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독특한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시에서 이미지에 주목했던 유파로 이미지즘이 있었지요. 이미지즘이 선구자였던 미국의 시인 에즈라파운드는 이미지를 “상이한 관념들이 즉각적인 시간에 정서적 복합체를 통합해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1913년 「이미지즘」이라는 글에서 이미지스트가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1. 어느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쓰지 말 것.
2. 아무런 장식도 쓰지 말거나 아니면 훌륭한 장식만 쓸 것.
3. 그럴듯하려고 하지 말 것, 묘사적이 되려고 하지 말 것.
4.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최상의 운율들로 채울 것
이 항목들을 보면, 이미지즘이 단순히 이미지의 조형성에만 집중한 사조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실적이고 묘사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절제된 표현과 최상의 운율을 강조하고 있지요. 서양의 이미지즘의 1930년대 한국 시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회화적 이미지나 주지주의적 태도만을 내세우는 사조로 협소해진 감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지를 생산하고 수용하는 신체의 감각은 시각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각할 때는 실제로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 다양한 감각이 함께 결합됩니다. ‘공감각적 표현’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이것은 시인이 두 가지 이상의 감각을 인위적으로 결합한 것이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통합적인 감각 작용에 충실하게 반응하면서 생겨난 결과물인 것이지요.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는 다양한 감각들이 서로 넘나들며 풍성한 이미지를 빚어낸 시입니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전문
이 시는 ‘나’와 ‘그대’의 만남을 ‘물’과 ‘불’이라는 원형적 요소들이 결합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자칫 추상적으로 흐를 수도 있는 주제가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 덕분에 구체적인 형상을 얻고 있습니다. 1연의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는 청각적 이미지, 3연의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는 촉각적 이미지, 4연의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는 청각적 이미지. “넓고 깨끗한 하늘”은 시각적인 이미지 들이지요.
여기서 ‘불’은 시련과 소멸의 시간을 상징하고, ‘물’은 풍요와 재생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물과’과 ‘불’은 감각적으로 대비를 이루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결합하게 됩니다.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는 ‘우리’가 만나는 소리이자 ‘물’과 ‘불’이 만나는 소리이기도 하지요. 이처럼 이미지는 비유나 상징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난 홍수에 젖은 세간들이
골목 양지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햇볕 볼 일이 한 번도 없었을
늙은 몸뚱이들이 쭈글쭈글해진 배를 말리고 있다
긁히고 눅눅해진 피부
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구멍 뚫린 퇴행성 관절들이 삐걱거리며 엎드린다
그사이 당신도 많이 상했군
진한 햇살 쪽으로 서로 몸을 디밀다가
보게 야윈 어깨를 알아보고 알은 체한다
살 델라 조심해, 몸을 뒤집어 주며
작년만 해도 팽팽하던 의자의 발목이 절룩거린다
풀죽고 곰팡이 슨 허접쓰레기,
버리기도 힘들었던 가난들이
아랫도리 털 때마다 먼지로 풀풀 달아난다
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
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
―최영철, 「일광욕하는 가구」 전문
이 시는 홍수에 젖은 세간들이 몸을 말리는 모습을 의인화해서 보여 줍니다. 전체적으로 가구들이 외양을 묘사하는 데 주력하고 있지만, 묘사를 비유(의인법)와 결합하고 대화체를 삽입함으로써 묘사적 이미지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구를 말리는 게 아니라 가구가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선, 가구의 각 부분은 ‘배’, ‘피부’, ‘관절’, ‘어깨’, ‘발목’, ‘아랫도리’, ‘근육’, ‘얼굴’ 등 인체에 비유됩니다. 또한 수동적인 가구는 ‘앉다’, ‘쬐다’, ‘말리다’, ‘엎드리다’. ‘디밀다’, ‘알아보다’, ‘알은 체하다’, ‘뒤집어 주다’, ‘절룩거리다’ 등의 주어가 됨으로써 능동적인 존재로 그려집니다. 가구들이 직접 대화를 주고 받는 대목은 이러한 의인화의 효과를 극대화한 것입니다. 묘사적 이미지가 비유적 이미지와 결합해서 재미있는 풍경을 연출해 낸 경우이지요.
페차장 여기저기 풀 죽은 쇠들
녹슬어 있고, 마른 물들 그것들 묻을 듯이
덮여 있다. 몇 구루 잎 떨군 나무들
날카로운 가지로 하늘 할퀴다
녹슨 쇠에 닿아 부르르 떤다.
눈 비 속 녹물들은 흘러내린다. 돌들과
흙들, 풀들을 물들이면서, 한밤에 부딪치는
쇠들을 무마시키며, 녹물들은
숨기지 않고 구석진 곳에서 드러나며
번져나간다. 차 속에 몸을 숨기며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바지에도
붉게 묻으며.
―이하석, 「폐차장」
최영철의 「일광욕하는 가구」가 의인화를 통해 주관적으로 변현된 이미지를 보여 준다면, 이하석의 「폐차장」은 비교적 묘사에 충실하고 객관적 이미지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폐차장에 방치된 사물들은 그 자체로 호명됩니다. 인용된 1연에는 ‘쇠들’, ‘풀들’, ‘나무들’, ‘녹물들’, 돌들, ‘흙들’,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의 세계는 붉은 색으로, 자연이 세계는 푸른색으로 그려져 색체의 대비가 두드러집니다. 그 대립된 세계가 서로 고통스럽게 만나고 있는 곳이 바로 폐차장이라는 공간입니다. 그 대립된 세계가 서로 고통스럽게 만나고 있는 곳이 바로 폐차장이라는 공간입니다.
시인은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어 폐차장의 이미지를 그려 낼 뿐이지만, 그 시선 속에서 우리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실감있게 그려 내는 것만으로도 시인의 인식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나희덕, 『한 접시의 시』, 창비,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