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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경적 구조와 시점

 

  서경적 구조는 가시적인 이미지를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적 구조는 고정된 대상을 묘사하느냐, 주변의 사물들을 묘사하느냐, 장소를 이동하며 묘사하느냐에 따라 서경적 고정시점, 회전시점, 이동시점으로 나뉜다. 또한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의 조각을 하나의 작품 안에 수용하는 서경적 영상조립시점이 있다. 다만 서경적 영상조립시점은 고정, 회전, 이동시점과 다른 구성 원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아울러 각각의 시점은 독립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두 개 이상의 시점이 섞여 사용될 수도 있다.


  서경적 구조는 관찰자의 눈을 통해 인지한 이미지를 묘사하기 때문에 사실적인 장면을 제시한다. 이때 가시적 이미지는 가시권의 이미지와 비가시권의 이미지 모두를 포함한다. 가시권의 이미지는 눈앞에 펼쳐져 직접 볼 수 있는 이미지이며, 비가시권의 이미지는 지금 당장을 볼 수 없지만 우리가 눈으로 직접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이다.

  이를테면 도시 속의 시적 화자가 바로 볼 수 있는 버스나 빌딩의 사실적 장면이 가시권에 속하는 가시적 이미지이며, 북극의 오로라나 아프리카의 초원처럼 지금 당장은 볼 수 없지만 해당 장소로 이동하면 볼 수 있는 장면이 비가시권에 속하는 가시권에 속하는 가시적 이미지이다. 서경적 구조는 그것이 가시권에 놓인 사물을 묘사하든, 비가시권에 놓인 사물을 묘사하든, 모두 가시적 이미지를 재현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 이미지의 재현을 중요한 축으로 삼는다. 그러나 현대예술에서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 복제하는 것이 최선이 아닌 것처럼, 시의 경우도 대상(의 상투적인 부분)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서경적 구조 역시 새로움이 작품의 중요한 미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경적 구조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묘사의 양상이다. 그 이유는 시가 우리의 삶의 국면을 다루는 것이니만큼 대다수의 묘사가 우리 삶의 사실적 풍경을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심상적 구조를 통해 나타나는 묘사의 경우에도 작품 전체에 심상화된 이미지가 나타나기보다는 서경적 구조를 기반으로 심상적 구조의 묘사가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서경적 구조는 묘사의 대상으로 주변의 익숙한 것들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때 대상을 상투적 인식의 수준에서 바라볼 때 문제가 발생한다. 시적 대상을 상투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시적 대상이 전달하는 상식적인 부분을 감각하는 것이다. 아울러 시인의 감수성이 상투적인 층위에 머물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서경적 구조는 이와 같은 진부함을 극복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가 익숙한 대상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사실 이아 같은 문제는 모든 시적 대상과 정황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다만 서경적 구조의 경우, 시적 대상을 상투성의 관점에서 대할 때 이러한 낡은 감수성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바슐라르가 아름다운 나무가 아닌 고통 받는 나무일 때 고통이 한층 더 깊은 것으로 우리에게 느껴진다고 했던 것처럼, 감상적 인식이 전달하는 단편적인 아름다움은 배격되어야 한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20180320_041358.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730pixel, 세로 2660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8년 03월 20일 오후 4:11

 

  이명호의 사진은 평범한 자연에 머물 수 있는 풍경을 새로움의 감각으로 치환한다.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자연의 서경적 모습에 흰색 천을 설치함으로써 대상(나무)과 배경을 분리시키는데, 그럼으로써 이명호가 바라보는 자연은 기존의 모습과는 다른 감각을 전달하게 된다. 흰색 천이 없었다면 사진 속의 풍경은 특별한 개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흰색 천을 설치함으로써 평범한 자연은 미적 인식을 전달하는 특별한 양상으로 전이된다.

  이 사진을 통해 대상의 새로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서경적 국면의 상당수가 진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상을 새롭게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이명호의 사진처럼 실제에 비현실의 감각을 입힐 필요도 없다.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다르게 해도 진부함은 극복될 수 있다. 이명호의 사진 속 자연 역시 흰색 천을 없애고 바라본다면 평범한 자연의 풍경일 뿐이다. 그러나 흰색천이 덧대어짐으로써 평범한 자연은 지배적 정황을 획득하게 된다. 서경적 장면을 파악한다면 그것을 평범한 사물에서 지배적 인상을 제시하는 시적 대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리어카를 끌고 가는 남자

페지를 줍는 노인

막노동을 하는 남자

좌판을 펼친 노점상

구걸하는 사람

산동네의 골목길과 귀가하는 젊은 가장

 

  위의 예문은 문학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장면들이지만 실제로는 상투성을 지니고 있는 정황이다. 이와 같은 정황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서경적 국면으로 묘사를 할 때 가장 많이 경험하게 되는 오류가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다. 흔히 문학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정황은 이미 문학적인 시효를 상실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투적 진부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정황을 사용하지 않거나, 이러한 정황의 새로운 면모를 파악해야 한다.


  서경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서경을 사실적 장면이라고만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서경을 상식 수준에서 파악하는 상투적인 장면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보편타당한 장면이 아닌 이미지를 서경의 범주로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적 장면은 우리가 늘 보아왔던 익숙함의 범주 안에서 이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보편타당하고 익숙한 서경이 아닌 장면도 있지 않을까? 한성필의 마그리트의 빛은 서경적 장면이지만, 심상적 감각을 통해 우리의 미의식에 잠입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작품은 서경적인가? 아니면 심상적인가? 한성필의 마그리트의 빛은 실제로 공사중인 건물의 가림막을 찍은 사진이다. 따라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환상적인 이미지는 심상적 이미지가 아니라 실재하는 서경적 이미지이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20180320_074108.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730pixel, 세로 2660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8년 03월 20일 오후 7:39

한성필, 마그리트의 빛, 2008

 

  이 작품을 통해 생각해볼 문제는 우리가 믿고 있던 서경적 이미지란 무엇인가이다. 그동안 서경적 이미지는 보편적 범주 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경우, 상투성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진부한 장면을 작품화하게 될 여지가 크다. 서경적 묘사가 언제나 낯선 장면을 통해 구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늘 보던 것만을 표현하려고 할 때 문제는 발생한다. 굳이 한성필의 작품과 같이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허상을 오가는 것은 아니더라도, 새로움을 찾으려는 노력만큼은 절실히 요구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성필의 작품을 예로 들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현실이나 비틀린 장면에 대한 강조가 아니다. 단지 서경적 이미지가 드러낼 수도 있는 상투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적 구조는 가시적 정황만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상상력을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서경적 구조 역시 상상력을 통해 낯선 세계를 불러올 필요가 있다. 또한 서경적 구조로 파악한 눈앞의 실체가 다른 서경으로 낯설게 전이될 수도 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서경적 구조가 사실적 장면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익숙한 관계로 이루어진 상투적 장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경적 구조가 상투적 묘사의 함정이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식의 노력이 필요하다, 첫 번째, 기존의 작품들이 보여 주었던 장면을 아무런 반성도 없이 관습적으로 가져다 쓰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동안 익숙하게 보아온 풍경을 집중적인 관찰과 표현이 부재한 상태로 표현하면 진부함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주변의 사물을 단편적인 서경과 사실로만 인식할 때 뻔한 서경이 나타난다.

  두 번째, 우리가 흔히 문학적 국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진부함을 극복해야 한다. 문학적 장면이라고 쉽게 떠올리는 것들 중에는 상투적인 문학적 감상성에 기댄 것이나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어 낡은 것들이 많다. 물론 이와 같은 장면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기존의 진부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장치이다. 새로움이 결여된 장면은 낡은 감각을 재생산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들은 문학적 포즈만을 양산할 뿐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세 번째, 서경적 구조를 떠올릴 때 자연을 중심으로 한 서정적 장면만을 떠올리는 것 역시 주의해야 한다. 자연과 서정이 우리 시의 중요한 부분임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을 떠올리는 것은 곤란하다. 아울러 자연이나 서정과 연관된 진부한 장면을 손쉽게 떠올리는 것도 삼가야 한다.

  네 번째, 서경적 구조를 통해 나타나는 장면을 일차원적인 아름다움은 미적 인식 차원에서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예술이 “‘아름다운 가상이기를 포기한 것처럼, 서경적 구조의 경우 감상적이고 일차원적인 아름다움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서경적 구조가 미적 아름다운이 아닌, 단편적인 아름다움에 머물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의 미학적 가치를 지닐 수 없게 된다.

 

   서경적 고정시점

 

  서경적 고정시점은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대상이나 국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이다. 하나의 대상이나 국면에 집중하게 되므로 서경적 고정시점은 묘사하고자 하는 사물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표현할 수 있다. 시를 쓸 때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관찰의 힘이다. 대상을 집중하여 관찰하지지 못한다면 묘사의 긴장감과 완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서경적 고정시점은 바라보는 대상을 낱낱이 분해하여 대상의 모든 이미지를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없었던 것들까지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또한 하나의 대상을 집중적으로 관찰하여 표현하기 때문에, 구체적 언술로서의 시 쓰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이러한 관찰의 힘은 심상적 고정시점에서도 동일하게 얻을 수 있는 효과이다. 하지만 심상적 구조는 시적 정황을 비현실이나 환상 같은 비가시적 세계로 변주하기 때문에 문장과 관찰의 정교함 이상으로 상상력의 힘이 강조된다. 이에 반해 서경적 고정시점은 분명하게 제시된 가시적인 세계에 집중하기 때문에 심상적 고정시점에 비해 정황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데 힘이 집중된다. 심상적 고정시점이 묘사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변주하려는 반면, 서경적 고정시점은 대상 자체의 사실적인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묘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묘사 자체에 좀 더 집중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 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김기택, 곱추, 전문

 

 

도로 위에 납작하게 누워 있는 개 한 마리

터진 배를 펼쳐놓고도 개의 머리는 건너려고 했던 길의 저편을 향하고 있다. 붉게 걸린 신호등이 개의 눈동자에 담기는 평화로운 오후. 부풀어오른 개의 동공 위로 물결나비 한 마리 날아든다. 나비를 담은 개의 눈동자는 이승의 마지막 모퉁이를 더듬고 있다. 개의 눈 속으로, 건너려고 했던 저편, 막다른 골목의 끝이 담긴다. 개는 마지막 힘을 다해 눈을 감는다. 골목의 끝이, 개의 눈 속으로 사라진다. 출렁이는 어둠 속으로

물결나비 한 마리 날아간다.

납작하게 사라지는 개의 죽음 속으로

조동범, 전문

 

김기택의 곱추와 조동범의 는 각각 고정된 시적 대상인 꼽추 노인과 개를 묘사하고 있다. 이때 시적 화자의 시선은 시적 대상에 고정된 채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꼽추 노인과 개의 이미지를 낱낱이 파헤치고자 한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재현된 시적 대상은 묘사를 통해 구현되는 시적 사유의 지점을 보다 선명하게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서경적 회전시점

 

  서경적 회전시점은 화자나 시적 주체가 한 장소에서 주변의 사물을 파악하는 사실적 묘사의 방법이다. 이때 바라보는 시적 대상은 화자나 시적 주체의 주변에 존재한다. 서경적 회전시점은 주변의 사물들 가운데 무엇을 포착하느냐가 관건이다. 수많은 사물 가운데 시의 주제와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함으로써 서경적 회전시점은 시적 정황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서경적 회전시점은 주변의 사물과 정황 가운데 어느 것을 배제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시적 정황으로 기능할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함으로써, 작품에 지배적 인상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이 도시는 연중 삼백 일 이상 비 올 확률 백 퍼센트

  새우 시체가 부유하는 튀김 우동은 수증기를 내보이고

  마스카라와 아이새도가 번진 몸무게 사십이 킬로그램의 매춘부는 파란 비닐우산을 들고 편의점 앞에 서 있다

  축축히 젖어 털이 곤두선 시궁쥐들이 교미를 하고

  각각 무릎 위로 짧게 그리고 복사뼈를 덮게끔 교복 치마를 수선한 여고생 두 명이 벤슨 앤 헤지스 담배를 피우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비에 젖은 풀잎처럼 곱게 빗은 단발머리는 아니다

  다리를 저는 젊은 사내가 운영하는 레코드점에서는

  도어스의 라이더 온 더 스톰이 흘러나오고

  더러운 컨버스 올스타 하이탑 농구화와

  1979년산 리바이스 오공오 청바지는 물을 먹는다

  속눈썹 사이로 물방울이 흐르고

  아무도 히치하이커를 차에 태워주지 않는다

  뒷골목 폐차 안에는 난자 당한 소년의 시체가 이틀째 방치

되어 있다

  피로 심판 받았다면 물로써 정화되어야 한다

  쓰레기통 곁에 주황색 얼룩의 패드만 발에 밟힌다

  티브이 시청도 싫증 난 젊은 실업자는

  주차된 아버지의 차 안에 앉아 와이퍼를 계속 작동시키고

  시내는 항상 교통 체증이다

  ―이승원, 근미래의 서울부분

 

  「근미래의 서울의 화자는 도시의 어느 지점에서 주변을 바라보고 있다. 화자의 시선은 튀김 우동을 보기도 하고 몸무게 사십이 킬로그램의 매춘부를 바라보기도 하며 뒷골몰 폐차 안난자 당한 소년의 시체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풍경은 이 시의 제목인 근미래의 서울을 향해 치밀하게 조직된다. 서경적 회전시점은 이처럼 주변부의 사물이 모여 일관적 시적 정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서경적 이동시점

 

  서경적 이동시점은 시의 배경이 되는 사실적인 이미지의 공간을 이동시키는 묘사의 방법이다. 시의 화자는 장소를 따라 이동하며 시적 배경과 공간의 변화를 경험한다. 그런데 서경적 이동시점은 서사적 구조를 동반하며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그 이유는 장소가 이동하는 공간적 국면이 시간의 이동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경적 이동시점은 공간의 이동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만일 공간이 연결되지 않고 분절된다면, 그것은 이동시점이라기보다 영상조립시점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상적 이동시점의 경우는 서경적 이동시점과는 달리 공간 이동이 낯설게 전개되어도 어색함이 적다. 심상적 구조가 비현실과 환상을 근간으로 삼기 때문에 공간의 전개가 하나의 흐름 속에 연속성을 띠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흘린 듯 끌린 듯 따라갔네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또박거리는 하이힐은 베짜는 소린 듯 아늑하고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는 엉덩이는

항구에 멈추어선 두 개의 뱃고물이

물결을 안고 넘실대듯 부드럽게 흔들렸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점심시간이 벌써 끝난 것도

사무실로 돌아갈 일도 모두 잊은 채

희고 아름다운 그녀 다리만 쫓아갔네

도시의 생지옥 같은 번화가를 헤치고

붉고 푸른 불이 날름거리는 횡단보도와

하늘로 오를 듯한 육교를 건너

나 대낮에 여우에 홀린 듯이 따라갔네

어느덧 그녀의 흰 다리는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

공동묘지 같은 변두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네

나 대낮에 꼬리 감춘 여우가 사는 듯한

그녀의 어둑한 아파트 구멍으로 따라들어갔네

그 동네는 바로 내가 사는 동네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

그녀는 나의 호실 맞은 편에 살고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며 경계하듯 나를 쳐다봤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낯선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장정일, 아파트 묘지전문

 

  장정일의 아파트 묘지는 한 여자를 따라가는 의 이동 경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도심을 지나 변두리 아파트 단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끊김 없는 경로를 따라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서경적 이동시점은 이처럼 분절되지 않는 이동 경로를 통해 펼쳐지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서경적 이동시점은 구조적으로 안정감을 갖는 공간과 서사를 획득하게 된다. 아울러 고정시점이나 회전시점보다 더 많은 공간을 등장시킴으로써 시적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기도 하다. 이때 서경적 이동시점은 가시권에 있는 일상적 공간을 배경으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가시권에 있는 이국적 공간을 통해 제시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낯선 공간의 이동이라는 비일상성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환기할 수 있다.

―장정일,「아파트 묘지」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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