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유추하기
은유에 관한 기초적 단계의 이론들을 점검해보면, 은유에 대한 인식은 A와 B 사이에 발생하는 유사성을 유추하고 그것의 의미를 종합하는 과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데 합의하는 듯 보인다. 이는 은유 인식의 기본적 틀이라 할 수 있다. 은유는 두 개의 다른 층위의 사물이나 사태를 하나로 결합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은유는 불화나 갈등보다는 화해와 융합의 세계를 지향한다. 종합으로서의 세계, 보다 풍부해지려는 인식론적 충동의 세계가 은유 생성의 기저다. 따라서 A와 B 사이에 어떤 공통분모가 있는가를 알아차리는 것은 은유를 이해하려는 데 애무 중요한 능력이다. ‘닮음’을 유추해낼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우리는 A와 B의 닮음을 발견함으로써 은유를 즐길 수 있다.
사시사철 한숨 날리던 벌판 위로 오늘은. 연을 띄우고 있으므로. 삽과 괭이는 겨울잠을 자게 두고 우리는. 햇볕 잘 스며드는 전주 한지에 추워서 푸른 대나무. 갈라. 다듬어. 붙여 힘센 바람의 성깔 아는 명주실에. 유리풀 먹여 새로 찧은 쌀가마니를 빈 곳간에 져다 부리듯 공중으로 들창만한 방패연을 냅다 던지면 어느새 얼레 잡은 손목에 불끈 솟는 힘줄이여. ―안도현, 「연날리기」 부분
이 시는 겨울 농한기에 연을 만들어 띄우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 장면들은 농경문화의 정서를 매우 자연스럽게 촉발시키지만 이때 동원된 문장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맥 이해의 용이함과 달리 그 결합된 형태는 결코 단조롭지 않다. 다양한 은유와 직유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은유와 직유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농기구를 제유한 삽과 괭이는 겨울잠을 자는 동물의 층위로, 방패연은 새로 찧은 쌀가마니라는 곡물그릇의 층위로 공중(하늘)은 빈 곳간이라는 건축물(창고)의 층위로 이동한다. 이때 독자는 이러한 층위의 이동을 낯섦보다는 친숙함으로 경험한다. 원관념 A와 보조관념 B의 층위가 서로 이질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 농경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닮음’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닮음’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시의 내면에 농경적 상상력이 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처럼 진부함으로 떨어지지 않은 친숙함은 정겨움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재래서정의 경우 그 은유의 양상은 위의 예처럼 자연스러움과 친숙함의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안도현은 시처럼 은유는 늘 ‘닮음’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두 개의 이질적 사물이나 상황을 유사성으로 결합했을 때 그들 간의 이질적 측면 또한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은유는 결합력에 의해 이질성마저 유사성 안에 포함시킬 뿐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은유를 발견하고 그로부터 풍부한 의미를 해석하는 즐거움에는 친숙함(유사성)의 확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선 것들의 결합을 발견했을 때, 생각지 못한 새로운 상상의 구도와 만났을 때 없었던 세계의 윤곽이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유사성보다 차이성에서 비롯되는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은유는 A와 B의 유사성만큼이나 차이성의 작용력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유사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인지하면서 그것들이 경계가 시의 맥락 속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가를 간파한다. 이러한 사고 과정은 동시적이다.
엣날엔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이 있었으나 지금은 빵 하나 나 하나 빵 둘 나 둘이 있을 뿐이다 정신도 육체도 죽을 쑤고 있고 우리들의 피는 위대한 미래를 위한 맹물이 되고 있다 ―정현종, 「최근의 밤하늘」 부분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최승자, 「일찌기 나는」 부분
1. ‘양쪽 모서리를 함께 눌러주세요’ 나는 극좌와 극우의 양쪽 모서리를 함께 꾸욱 누른다
2. 따르는 곳 ↓
극좌와 극우의 흰 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
3. 빙그레!
―나는 지금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를 들고 있다 ―빙그레 속으로 오월의 라일락이 ―서툴게 떨어진다 ―오규원,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 부분
위의 인용한 세 편의 시가 지닌 언어적 긴장감은 원관념 A와 B 사이에 발생하는 유사성보다는 차이성 때문에 생겨난다. 그것을 하나하나 짚어보면, 우선 정현종의 「최근의 밤하늘」은 신성함을 세속적 욕망으로 대체해버린 우리들의 왜소한 삶의 형상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시인은 정신과 육체를 ‘죽’이라는 액상 형태의 음식 층위로 이동시킨다. ‘죽을 쑤다’는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 사용하곤 하는 관용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죽을 쑤다’라는 표현이 어떤 ‘일’이 아닌 존재(정신과 육체)의 층위와 결합됨으로써 그 상투성을 벗어나 조롱조의 유머를 만들어내는 효과를 얻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은 견고성이 무너진 정신과 육체의 형상을 빚어냄으로써 초라하기 그지없는 존재의 상태로 드러낸다. 아울러 ‘피’ ‘맹물’의 층위로 이동시키는데 이 둘은 형태상 액체라는 유사성을 지니지만 그 질적인 면에서는 큰 차이를 지닌다. 시인은 피와 맹물이 지닌 차이를 이용해서 세태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최승자의 「일찌기 나는」은 ‘나’라는 존재를 ‘곰팡이’, ‘지린 오줌 자극’, ‘구더기에 뒤덮인 시체’로 이동시킨다. 이 불결하고 비천한 이미지는 인간 존재와 거리가 먼 것들이다. 이때 ‘나’로 수렴될 수 없는 사물들과의 결합은 유사성이 아니라 차이성을 부각시킨다. 화자는 자신의 존재성을 이러한 이미지로 이동시킴으로써 인간에게 당위로서 부여된 고귀함이나 존귀함과는 거리가 먼 비인간적 존재의 상태를 드러낸다. 이는 결합할 수 없는 혹은 결합해서는 안 되는 것과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존재가 생명 없는 사물로 이행해가는 이 자학적 심연에는 파괴된 존재의 고통이 암시되어 있다.
오규원의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는 빙그레 우유곽의 사용법을 알려주는 광고 문구와 현실정치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놓은 경우다. 빙그레 우유는 ‘웃음’과 ‘영양’이라는 긍정적 가치를 함축한다. 그러나 ‘극좌와 극우’로 표현되는 현실정치는 부패를 암시하는 ‘고름’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은 이 둘의 극단적인 차이를 충돌·결합시킴으로써 극좌와 극우로 양분된 썩은 정치의 실상을 비판하고 있다. 이때 오월의 라일락은 ‘서툴다’라는 시어가 환기하는 불편함과 불안정성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착잡한 정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살펴본 세 편의 시는 모두 원관념 A와 본래적 상태로부터 변절된 상태를 강조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정신과 육체는 죽으로, 피는 맹물로, ‘나’는 불결한 사물로, 정치는 썩은 우유로 이동됨으로써 그것들이 보존해야 하는 고유한 가치를 상실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은유는 A와 B의 ‘차이성’을 포착함으로써 해석의 타당성을 얻을 수 있다. 은유는 이질적인 것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둘을 겹쳐놓은 방식이지만 그것의 의미는 반드시 유사성만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수많은 은유는 A와 B를 결합함과 동시에 그 차이를 충돌시킨다. 따라서 은유에 대한 이해는 A와 B의 유사성과 차이성을 동시적으로 유추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다. ―엄경희, 『은유』, 모악, 2016. |
2020.04.25 20:38
유사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유추하기(은유)/엄경희, (박수호 시창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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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유추하기(은유)/엄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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