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이동과 융합의 놀이(은유)/엄경희 (박수호 시 창작에서)
순간이동과 융합의 놀이 ‘놀이’라는 말에는 뭔가 자유롭고도 즐거운 관념이 늘 따라붙는다.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에 따르면 놀이는 생활의 진지함과 반대되는 행위이며, 그것은 노동과 반대되는 낭비된 시간으로 인식된다. 놀이는 업적을 생산하지도 않으며 부富를 낳지도 않는다. 즉 놀이는 실질적 보상이 없는 무상성無償性을 근본으로 한다. 따라서 실리주의자에게 놀이는 엉뚱하고 헛된 짓처럼 여겨진다. 득이 없는 이 무상성의 세계를 왜 사람들은 좋아할까? 놀이하는 자는 놀이의 세계 안에서 무한히 자유롭다. 실질적 보상이 없기 때문에, 보상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놀이는 자유를 선사한다. 그 자체의 즐거움이 모두인 세계를 마음껏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놀이는 잠시 동안 현실의 억압을 끊어버린다. 억압 없는 자유의 세계 속에서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은 현실적 자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열정적으로 웃고 박수치고 소리 지른다. 이러한 놀이의 가치와 진실은 모든 예술에 잠복되어 있는 중요한 동력이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늘 고뇌와 고통만으로 창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창작에는 그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뒤따른다. 시인은 가지고 노는 자이다. 그는 언어를 매개로 세계와 자신을 고민하고 논다. 은유적 사유의 이동성과 융합성은 이러한 놀이정신의 소산이다. 이동하고 융합하고 충돌하고 자리를 바꾸는 일련의 움직임이 곧 은유의 놀이라 할 수 있다. 은유는 한 마디로 말해 사유의 층위가 움직여 의미의 양을 풍부하게 만드는 언어 운용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원관념 A가 B로, C로, D로 움직여갈 때 하나의 고립된 세계의 문이 열리고 섞이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계의 증폭과 이지적인 것의 혼재, 그리고 서로 다른 것들이 남기는 차이의 잔상이 함께 존재한다. 이때 원관념 A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 고민하는 ‘나’는 사유하는 자이면서 놀이하는 자이다. 은유를 생성시키는 자는 A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B를 스스로 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 우리의 눈이 두 가지 물감이 섞일 때 그 신비감을 체험하듯 두 개의 세계가 섞일 때 시인은 다른 사람이 체험할 수 없었던 세계를 이룩하는 기쁨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이 놀이는 움직이는 사유의 유희라 할 수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 층위 변동도 확장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 소원은 죽은 토끼, 죽은 토끼는 녹슨 총, 녹슨 총은 편지지, 편지지는 꽃무늬, 꽃무늬는 손톱, 손톱은 두 번째 죽은 토끼, 두 번째 죽은 토끼는 두 번째 녹슨 탱크, 녹슨 탱크는 나비, 누군가의 가슴에 앉은 두 마리 나비, 나비는 가로등, 가로등은 눈 덮인 산, 산은 술잔 속에 빠진 별, 별은 주유소, 주유소는 나의 고독, 고독은 네가 준 보석, 보석은 수없이 부서지는 나, 나는 끝없이 불어나는 너, 너는 내 소원, 내 소원은 죽은 토끼 ―박상순, 「내 소원은 죽은 토끼」 전문 은유는 시어의 유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언어 운용의 원리이다. A를 B로 전이하는 과정에는 하나의 세계(사물)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혼란시키는 놀이하는 인간이 개입되어 있다. 그는 이것에 저것을 결합함으로써 이것만이 아니라 저것의 의미까지도 용도 변경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은유적 담론의 발생과정에는 ‘닮음’과 ‘다름’이 서로 충돌하는 카오스적 심연이 놓여 있다. 이 시는 이와 같은 은유의 유희성을 과감하게 증폭시킨다. A에서 B로 C로 D로 계속 이어지는 은유의 재빠른 연쇄는 독자에게 활기와 당혹감을 동시에 준다. 치환되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이질성이 너무 커서 유사성의 유추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내 소원은 죽은 토끼」의 긴장과 재미는 일차적으로 여기에 있다. 이 시에 흥미를 가진 독자라면 은유의 연쇄를 쫓으며 언어의 간극을 채워가는 상상의 놀이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이 시의 화자가 ‘소원’이라 지시한 ‘죽은 토끼’는 무엇일까? 엉성하게라도 수많은 보조관념으로부터 연상되는 서사의 줄기를 먼저 구성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편지지나 꽃무늬 사랑, 연애, 교신 정도의 의미를, 총과 탱크는 전쟁 정도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둘의 의미를 결합해보면 “사랑은 전쟁이다”라는 문장이 구성된다. 이를 바탕으로 일단 ‘죽은 토끼’를 떠나버린 연인쯤으로 해석해보자.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총, 녹슨 탱크, 편지지에서 이별(전쟁과 불화)을, 꽃무늬, 손톱, 나비에서 그녀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가로등, 눈, 별, 보석에서는 휘발하는 빛의 차가움과 이로부터 환기되는 화자의 고독을 연상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연상에 의해, 각각의 은유들이 ‘사랑’과 인접된 사물로 전이된다는 점에서 이 시의 문맥은 환유적 맥락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은유의 연쇄를 통해 연인과 ‘나’의 이별이 “나는 끝없이 불어나는 너”로 치환됨으로써 의미의 역전을 이루어낸다는 데 있다. 화자의 마음속에 ‘죽은 토끼’는 ‘나’의 이별이 “나는 끝없이 불어나는 너”로 치환됨으로써 의미의 역전을 이루어낸다는 데 있다. 화자의 마음속에 ‘죽은 토끼’는 ‘나’와 분리되지 않는 영원한 사랑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보조관념이 이 시의 첫 구절인 “내 소원은 죽은 토끼” 되돌아가 다시 시작된다. 뒷말의 꼬리를 잡고 이어지는 이 시의 구조는 도돌이표에 의한 주창奏唱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별과 사랑에의 갈구가 영원히 순환하며 끝나지 않는 노래처럼 계속된다. 이때 화자의 고독은 슬픔으로 전달될지언정 독자의 의식을 짓누르지 않는다. 뒷말의 꼬리를 잡고 이어지는 신속한 리듬과 다채로운 의미의 전이가 무거움을 상쇄시키기 때문이다. 이 시는 지극한 고독과 슬픔을 담고 있지만 의미의 전이가 만들어내는 속도감에 의해 그 활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청승과 신파와 궁상을 몰아내는 활기가 열정의 내면화는 놀이하는 이간이 지닌 가장 큰 미덕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 시편도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이다. 비 맞은 운동장을 본 적이 있는가 단 한 방울의 비도 피할 수 없이 그 넓은 운동장에서 빗줄기 하나 피할 데 없이 누구도 달리지 않아 혼자 비 맞는 운동장 어쩌면 운동장은 자발적으로 비 맞고 있다 아주 비에 환장을 한 것처럼 혼자서만 비를 다 맞으려는 저 사지四肢의 펼쳐짐 머리끝까지 난 화를 식히기 위해서라면 운동장 전체에 내리는 비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별서는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벤치에 앉은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아예 하늘 보고 드러누운 사람이 되어 비를 맞다가 바닥을 향해 엎드려뻗쳐 한 사람이 되어 비를 맞아 버린다 혼자 비 맞고 있는 운동장, 누가 그쪽으로 우산을 든 채 걸어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검은 우산을 들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무슨 작은 구멍 같아 보이는 사람이 벌써 몇 바퀴째 혼자서 운동장을 돌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비 맞으며 뛰놀진 않는 운동장 웅덩이 위로 빗방울만 뛰노는 운동장에서 어쩌면 운동장 구석구석에 우산을 씌워 주기 위해 어쩌면 그건 그냥 운동장의 가슴에 난 구멍이 빗물에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공중을 달려온 비들이 골인 지점을 통과한 주자들처럼 모두 함께 운동장 위로 엎질러지는 동안 고여서 잠시, 한 뭉테기로 휴식하는 동안 우산은 분명 운동하고 있었다 혼자서 공 차고 노는 사람이 혼자서 차고 혼자서 받을 가듯 비바람에 고개 숙이며 간신히 거꾸로 뒤집어지지 않는 운동이었다 상하 전후 좌우로 쏟아지는 여름이 십자포화十字砲火를 견디며 마치 자기가 배수구라도 되겠다는 양 그 구멍 속으로 이 시의 제목까지 다 빨려 들어가 버려 종이 위엔 작은 구멍 하나만이 남아 있을 때까지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자신을 소멸시키겠다는 듯이 가까스로 만들어 낸 비좁은 내부 속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소릴 집중시키고 있었다 ―황유원, 「비 맞는 운동장」 전문 시인은 시원하게 비 맞는 텅 빈 운동장을 먼저 보여준다. 이때 텅 빈 운동장을 어떻게 묘사하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를 맞는 텅 빈 운동장은 비어 있기 때문에 그 비어 있음이 더 이상의 묘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황유원의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누구도 달리지 않아 혼자 비 맞는 운동장”이라는 표현을 통해 움직임과 정적靜寂을 충돌시킨다. 이어지는 “혼자서 만 비를 다 맞으려는 저 사지四肢의 펼쳐짐”이라는 표현을 통해 운동장을 거대한 몸을 지닌 생명체로 전이시켜 그 크기를 극대화한다. 그리고 “혼자서 비 맞고 있는 운동장”을 ‘혼자’나 ‘사지’와 더불어 ‘벌 서는 사람’, ‘벤치에 앉은 사람’, ‘하늘 보고 드러누운 사람’, ‘엎드려뻗쳐 한 사람’ 등의 어휘를 통해 인간의 층위로 거듭 전이시킴과 동시에 ‘비를 맞고’, ‘비를 맞다가’, ‘비를 맞아 버린다’와 같은 서술어를 통해 리드미컬하게 역동화한다. 이 같은 리듬은 운동장이 아니라 비의 양을 최대로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져 온다. 한편 운동장의 사지를 넓히고 비의 양을 늘려놓은 후 시인은 텅 빈 운동장에 검은 우산을 든 한 사람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검은 우산을 원경遠景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검은 우산은 비 오는 운동장에서 ‘구멍’처럼 인지된다. 그것은 다시 운동장에 난 ‘가슴의 구멍’으로 은유된다. 이때 비들은 ‘십자포화’로 달려오고 엎질러진다. 빗줄기가 총이나 포탄으로 은유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 검은 우산은 ‘혼자서’ 공을 차고 노는 사람처럼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움직임을 바라보던 화자는 그 검은 구멍이 ‘배수구’인양 빗소릴 빨아들이는 ‘집중’된 순간을 경험한다. “시의 제목까지 다 빨려 들어가” 하얀 종이와 검은 점 하나만 남는 기이한 이 합일의 순간은 빗소리의 정적감이 최대화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순간을 이처럼 유연하게 재현해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황유원의 활기에는 텅 빈 운동장에 비가 온다는 하나의 사태를 절제된 고독감으로 몰고 가는 놀이정신이 숨어 있다. 시인은 수많은 움직임으로 텅빈 공간을 채워 넣는다. 펼치고, 돌고, 떠다니고, 차고, 빨려들고와 같은 어휘들이 요란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비 맞는 운동장과 비 오는데 검은 우산을 쓰고 운동장을 돌고 있는 사람 모두의 정적과 고독감이 하나도 손상되지 않는다. 소란할수록 오히려 빗소리의 정적과 검은 우산에 점점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정념의 깊은 곳에 도달하도록 이끌면서도 그 정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게 하는 이러한 상상력의 펼침이 이 시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움직이는 사유의 놀이가 절대적이다. 시 형상화의 방법은 그것이 아무리 획기적인 방법일지라도 언어라는 질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즉 시는 언어를 통해서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사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현대의 다른 문화 예술이 드러내는 화려하고 현란한 면모에 짓눌리지 않고 시의 고귀함을 되살려내는 일을 결국 언어를 보다 의식적으로 운용하는 억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말을 놀이의 차원으로 의식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 형식을 발굴하려 하는 적극적 노력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단순학 자신의 아픔과 상처, 기억을 고백하는 차원을 벗어나 의식적으로 언어와의 진지한 놀이를 시도할 때 시의 새로운 영토가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의 놀이정신은 이미 만들어진 언어의 규약을 깨는 자유정신의 활발한 활동성으로부터 얻어진다. 시적 대상이나 주제에 압도되지 않은 채 그것과의 미적 거리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은 창작의 매 순간마다 놀이하는 정신을 깨우는 데 있다. 이는 시를 읽는 독자의 의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를 시답게 읽는 방법 즉 미의식의 확장은 언어의 결을 구성하는 시인의 놀이정신을 간파하는 데 있다. “성스러운 놀이의 영역에서 어린이와 시인은 미개인과 함께 산다”고 호이징하J. Huizinga는 말한다. 사전이라는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무규칙의 세계에서 다시 출발하고자 하는 미개인의 놀이적 충동이야말로 시의 생명성을 지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거듭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엄경희, 『은유』, 모악,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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