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강남, 몽夢/서금숙
눈웃음이 치열 고른 입까지 흘러내렸다. 남산만한 아버지의 뱃속에 빈 위스키병과 마담이 들어있다. 아파트 공사 일을 하는 아버지는 외삼촌이 지고 온 가방 속 돈다발을 꺼내 월급을 준다. 베란다처럼 줄을 서는 인부들, 인부들의 장화 속 쿰쿰한 돈 냄새가 집안 가득 번진다. 아버지는 돈을 잘 벌수록 배사장이 되어 갔다. 강남 아파트 분양이 끝날 무렵 아파트 붐이 일고, 입안에는 모래바람이 훈훈했다. 어머니는 오남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공사판 한쪽에 함바집을 차렸다. 국수를 삶는 솥에서 화독내가 나면 허기가 참을 수 없다고 뱃가죽에 딱 달라붙은 어머니 등이 휘었다. 사내 팔뚝만한 주걱을 휘휘 저었다. 국물을 우려낸 연기에 눈이 시렸다. 아버지의 배에 바람이 빠진 날, 일곱 식구가 강남 물을 먹던 날, 빨간딱지가 붙던 날, 버려진 교과서, 기억은 낙타를 타고 바늘귀를 넘고, 나는 아직도 강남 사는 꿈을 꾸곤 한다.
‘강남, 몽夢’, ‘2019「월간 시문학 」, 신인우수작품상
1970년대 강남 은마아파트 ------------------------------
‘강남, 몽夢’ 초꼬슴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시인들은 시집이나 시 제목에 있어 독특한 게 많다. 물론 작가의 고민과 의도적 결과일 수도 있다. 그래야만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고, 詩題에 의해 시의 고도로 절제되고 농축된 함의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강남, 몽, 시의 내용을 보지 않더라도 벌써 서울의 특구? 강남이다. 시쳇말로 대다수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곳이다. 과연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복락원일까? 아니면 헛된 망상가들에게는 실낙원이 아닐까? 또한 어떤 이들은 유토피아의 세계로 생각하기도 한다.― <유토피아>의 저자가 영국 출신이어서인지 그곳에서 외교관이었던 분도 그곳에서 꿈?을 이루기도 했다. ― 그렇지만 강남은 희망사일 뿐, 누구나 살 수 있지만 아무나 살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몽’이다. ‘강남의 꿈’이라 평범한 시제를 붙일 수 있었지만 ‘강남’다음에 쉼표(,)를 두고 ‘꿈’이 아닌 한자인‘夢’을 썼다. 대단히 의도적이다. 화자는‘강남’을 꿈꾸지만 ‘꿈’일 수밖에 없는 모순, ‘형용 모순’이면서 서로가 양립할 수 없는‘모순 형용’인 시인다운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은 1970년도 전후, 당시에는 강의 북쪽, 背山臨水인 한양이 최고의 양택지이다. 강의 이남인 강남은 한창 개발이 진행될 때이다. 아버지는 그 개발 공사현장의 사장이었을 것이다. 대단한 직책이고 위치이다. 지금과는 달라서 당시는 윗사람의 뒷주머니에 하청업자들의 은밀한 거래가 오가는 공사판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검은 거래는 강남의 술집에서 오갔을 것이고.
노동자들은 새벽 햇귀를 목에 두르고 저물녘엔 뒤 굽이 닳고 닳은 고흐의‘구두 한 켤레’를 신고 헛헛한 뱃속을 햇볕 몇 덩이로 채우며, 인내를 지불하며 절박한 상황 속 빈곤의 삶을 영위할 때, 아버지는 노동자의 응축된 피땀으로 뱃살을 살찌우고 그러다 뱃속은 부패되어가며 서서히 가스가 차며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하늘 높이 오르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말이다. 아니, 높이 오르다 날개를 잃고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된 것이다.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의 뱃속에서 위스키 병이 술에 취하고, 볼록 나온 배를 보며 마담은 두툼한 지폐를 보는 순간 자존심과 체면은 휘발되고, 아양 떠는 마담의 감미로움 앞에 도취될 수밖에 없는 황홀경, 그 속에서 뱅크럽트가 되어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타락의 강 깊은 수심으로 내려앉는 사이 강남의 물은 빨갛게 물들어 결국 마실 수 없게 되었으니, 강남의 꿈은 저 먼 팔당 상류에 낀 안개가 되어 작은 고양이의 발걸음으로 가족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움켜쥐려고 하지만 이미 꿈이 된 지난 일이다.
칼 샌드버그의 ‘안개’를 보자.
작은 고양이의 걸음으로 안개는 온다.
안개는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
항구와 도시를 바라본 뒤 걸음을 옮긴다.
가난한 사람, 특히 예고 없이 하루아침에 전도된 삶을 맞이하게 된 사람은 안개조차도 슬픔과 고난으로 다가올 뿐이다. 저 작은 고양이 발걸음 소리는 허울에 찬 형식주의자의 겉발림을 비웃고 안개 낀 삶을 무겁게 짓누른다.
이젠, 배사장인 아버지의 배는 死藏되었다 정신적 조난자가 된 후. 식구들 입안에는 사막풍이 불어왔다. 다섯 남매를 위한 어머니, 어둑새벽이 새벽같이 어머니를 깨운다. 어머니는 여자가 아닌 처음부터 어머니였을 것이다. 고된 노동자의 식사를 제공하는 장소, 황당한 상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위한다면 그 무엇을 못하겠는가. 눈물의 호수에서 잠겨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는 순간 뚜벅뚜벅 걸어 나와야만 했다. 그러한 모든 어머니는 저 멀리 울려 퍼지는 종소리이고 누구의 말처럼 천부적 죄인인지도 모른다.
화자는 그 때의 상황들을 세월이 흘러 잊힌듯 하지만 아직도 진행형이다. 상처 입은 세월의 울음을 머금고 있다. 쾌락과 허울에 젖어 곰팡이 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좁다란 바늘귀를 꿰뚫고, 버려진 교과서의 맨 마지막 장엔 “어린 씨앗은 어떤 환경에서도 땅 속에서 발길질 하고 있다”라고 씌어져 있을 것이다. 비록 벼랑 끝에 다다른 삶일지라도 허공에서도 새로운 삶을 찾기에. http://www.thenewsof.co.kr/news/view.php?no=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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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02:58
강남, 몽夢/서금숙, 홍영수 시인이 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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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몽夢/서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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