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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와 역설/여태천

 

 

 

 

1. 문맥의 이중화, 의미의 두 겹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 지시하는 것이 개념이건 구체적인 사물이건 간에 언어는 이 세계를 낱낱이 모두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비유를 통해서 종종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아마 시의 중요한 의의 중의 하나는 비유를 통해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비유란 ‘어떤 개념이나 사물’(=A)을 빗대어서 말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A와 B가 지니는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비유란 A를 B가 대신하는 유비적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다. 유비는 이 세계를 동일한 지평 위에서 사고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A와 비슷한 B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A와 비슷한 속성이나 자질을 B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A와 B가 서로 맞부딪치는 대조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발생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A와 B가 만나서 생기는 예상치 못한 대림, 긴장 마찰, 불균형 등을 이용하여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러니와 역설이 여기에 해당한다. 비유가 동일성에 의한 미적 효과라면, 아이러니와 역설은 비동일성에 의한 미적 효과다. 어떤 개념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이 시의 기본구조를 이루고 있는 다음 시에서 비동일성의 미적 효과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베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다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니, 오늘 외박하나?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베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야야, 어디 가노?

―예…… 바람 좀 쐬려고요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안상학, 「아배생각」

 

  대부분의 부자父子관계가 그렇듯, 이 시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 1연과 2연에서 진술되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어긋난 대화가 그 사실을 보여준다. 또 대부분의 철이 든 아들이 그렇듯, “외박을 밥먹듯” 했던 아들은 뒤늦게야 돌아가신(“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아들이 자주 했던 ‘외박’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유비적 사고의 큰 틀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의 특별한 재미는, ‘외박’과 ‘바람’에 대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생각에서 발생한다. 그것이 이 시의 또 다른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외박’과 ‘바람’에 대한 두 개의 문맥을 알아채는 것이 시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일반적으로 ‘외박’이란 ‘자기 집이나 일정한 숙소에서 자지 아니하고 딴 데 나가서 자는 잠’을 뜻한다. 1연에서 아버지가 “니, 오늘 외박하나?”라고 물었을 때, 아들은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라고 다소 능청스럽게 답한다. 아들은 보편적 개념에 기대어 ‘외박’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인데, 아버지는 평소 아들이 보여준 행동에 비추어서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라고 눙치는 듯하며 되묻는다. 외박을 밥 먹듯 하고 다니던 아들이 집에서 잠을 잔다는 게 아버지에게는 필시 ‘외박’일 것이다. 그런 아들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작정하고 따져 묻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 반문이 아들의 말문을 막는다. 1연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어긋난 대화는 ‘외박’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때문에 발생했다.

2연에서 ‘바람’을 둘러싼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흔히 ‘기분 전환을 위하여 바깥이나 딴 곳을 거닐거나 돌아다니는 것을’ ‘바람을 쐬다’라고 관용적으로 표현한다. 아들이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아버지가 “야야, 어디 가노?”라고 묻는다. 아들은 특별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딱히 그 목적이 있더라도 아버지에게 시시콜콜 다 얘기하기가 마땅지 않아 “예…… 바람 좀 쐬려고요”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분명치 않아도 아들은 ‘바람을 쐬다’라는 관용적 표현을 무시하고, ‘바람’이라는 말이 지닌 사전적 의미에 기대어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라고 다시 아들에게 못마땅하다는 듯 묻는다. 집을 자주 비우는 아들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집을 자주 비우는 아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들과 함께 있고 싶은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여기에는 담겨 있다. 역시 아버지의 이 반문도 아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2연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어긋한 대화는 ‘바람을 쐬다’라는 관용적 표현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때문에 발생했다.

 

  아들이 생각하는 ‘외박’과 ‘바람을 쐬다’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에 가깝다. 하지만 아버지가 생각하는 ‘외박’과 ‘바람을 쐬다’라는 표현의 뜻은 보편적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지점에 있다. 아버지가 보여주는 보편적 개념에 대한 반성적 거리 감각이 지금까지 아들이 무심코 사용했던 보편적 개념을 의심하게 만든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에서 드러나는 ‘외박’과 ‘바람을 쐬다’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은 이 세계가 단일한 의미와 가치로 이해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두 문맥과의 관계가 만들어 내는 대립, 긴장, 마찰, 불균형에 의해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 세계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2. 아이러니의 의미와 그 양상

 

  특별한 경우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기도 한다. 만약 그 이유가 상대방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진심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처럼 어떤 낱말이 문장에서 표현된 뜻과 반대되는 의미를 갖는 용법을 반어反語라고 한다. 흔히 아이러니irony라고 부른다. 수사학에서는 의미를 강조하거나 특정한 효과를 유발하기 위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말을 사용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은연중 나타내는 표현법을 말한다.

 

  아이러니는 ‘숨김’ ‘위장僞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eironeia’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 희극에 등장하는 에이런eiron은 비록 힘은 약하지만 겸손하고 현명했다. 반면에 알라존alazon은 강자이임에도 불구하고 자만하고 우둔했다. 에리런은 무지無知를 가장하여 어리석은 허풍쟁이 알라존을 물리치고 언제나 승리한다. 에이런과 알라존이라는 두 개의 페르소나persona가 아이러니를 만든다. 그러므로 알라존의 말(=드러난 의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며, 반드시 에이런의 말(=숨겨진 의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컨대 잘난 체 하는 친구가 또 자기자랑을 늘어놓을 때, ‘잘났어, 정말!’이라고 친구가 응수를 할 때가 있다. 이때 옆에 있던 친구가 진심으로 그 친구의 행동과 생각이 바람직하고 멋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했다고 믿을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언술이 보여주는 표면의 의미와는 다른 숨겨진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표현의 의미와는 달리 숨어 있는 의미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어린 화자를 내세워 보편적 행동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다음 시를 읽어보자.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란 슈가도 몽땅 털어 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박성우, 「삼학년」

 

  현실과 이상 사이에 거리를 보여주고 있는 이 시에는 두 개의 주체, 두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어린 아이와 어른이라는 두 주체는 미숫가루를 우물에 들어붓는 것에 대해 서로 가른 생각과 반응을 보인다. 미숫가루를 우물에 들어부은 아이의 행동은 에이런의 태도에 가깝고, 그 아이의 뺨을 때린 어른의 행동은 알라존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미숫가루를 우물에 들어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표면에 드러난 이 시의 의미다. 어른의 입장(=보편적 상식)에서 보자면 미숫가루를 우물에 들어붓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먹어야할 미숫가루를 먹을 수 없게 낭비한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다. 여기에 더해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해야 하는 우물을 더럽혔다는 사실이 아마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윤리적 처벌이 뺨따귀가 된다. 물론 우물에 미숫가루를 들어부은 아이의 행동은 보편적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그 행동이 옳지 않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 역시 그리 많지 않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질서를 위해 필요한 것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이상은 언제나 보편적 질서나 현실의 법칙을 벗어난 어떤 곳에 있게 마련이다. 아이의 행동은 그 이상에 가닿고 싶은 우리의 근원적 욕망을 보여준다. 보통의 아이라면 현실적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지 않다. 보통의 아이라면 현실적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지 많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미숫가루를 마음껏 먹고 싶어서 미숫가루를 우물에 들어부을 수도 있다. 그런 아이의 행동이 과연 처벌 받을 만한 일인가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시가 숨기고 있는 또 다른 의미며, 오히려 이 해석이 삶의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이 시에서 어린 아이와 어른은 각각 이상과 현실을 대신하다. 이 둘은 결코 타협할 수 없다. 이처럼 현실과 이상의 대립,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대립 등 이원론적 대립에서 종종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 경우를 낭만적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숨어 있는 문맥은 드러나 있는 문맥에 대한 다른 견해이므로 대체로 비판적이거나 풍자적인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는 특히 상황을 바라보고 인지하는 주체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 지적知的인 주체가 비非지적인 주체(=자기 자신)를 비판할 때 종종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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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확인 2007-10-26-13:50

 

헤어졌습니다

―성기완, 「당신의 텍스트 6」

 

  이별이라는 사건을 대하는 주체의 태도가 이 시의 아이러니를 만들어 낸다. ‘나’는 ‘당신’에게 헤어지자고 이별을 통지했다. ‘당신’의 마음을 아고 싶은데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수신확인 확인안함”).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수신확인 확인안함”의 반복) ‘당신’의 마음을 알고 싶어한다. 이미 헤어지자고 결정한 상태라면 상대방의 태도가 그 결정에 큰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이별할 마음이 없었을 소도 있겠지만 ‘나’는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확식이 없다. 예상을 뒤엎게도 그 결정은 ‘당신’이 내린다. “수신확인 2007-10-26 13:50”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당신’과 헤어졌다. 그러므로 “헤어졌습니다”라는 사건은 결국 ‘당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나’가 내려야 할 이별의 결정을 ‘당신’이 내리게 되는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이 시는 끊임없이 ‘당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며 ‘당신’의 태도에 따라 이별을 결정한 비비적인 주체의 행동을 숨어 있는 지적인 주체가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실에서 이와 같은 실수를 숱하게 저지른다. 주체란 불완전하며 불안정한 상태라는 진실을 이 시가 보여준다. 지적인 주체가 비판하는 대상이 비지적인 주체인 자기 자신을 넘어 보편적인 세계인 경우인 경우도 있다.

 

―아버지 송지호에서 좀 쉬었다 가요.

 

―시베리아는 멀다.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이상국, 「기러기 가족」

 

  이 시는 아버지 기러기와 아들 기러기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갈 길이 먼데 힘들다고 쉬어가자는 아들 기러기가 비지적인 주체에 가까우며, 이를 윽박지르듯 타이르고 있는 아버지 기러기가 지적인 주체로 보인다. 이미 “닐개도 없는 것들”에 대해 알고 있는 아버지 기러기는 날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임을 아들 기러기에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분소와 처지를 알면 삶이 행복할 수 있다. 아버지 기러기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아들 기러기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은 채 그것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런데 아들 기러기의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라는 질문은 아버지 기러기의 막무가내에 가까운 대답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런 소리 말아라”라고 말하는 아버지 기러기의 태도는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나왔다고 보기 힘들다.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라는 사실은 날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대답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 기러기와 아들 기러기의 대화르 ㄹ끝까지 듣고 곰곰이 생각하면 처음 품었던 판단이 옮지 않음을 알게 된다. 날아야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함구하는 아버지 기러기가 오히려 비지적인 주체며,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아들 기러기가 지적인 주체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므로 이 시를 삶에 대해 진지한 성찰과 고민을 하지 않고 어떤 목표만을 향해 질주하는 많은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속도 경쟁주의에 몰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자신을 혹사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자연스럽다. 현대 성과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피로한 개인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자신을 소모하는 복종적 주체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뭐든지 가능하다는 믿음에 의지한 채 자신을 혹사한다.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가는 것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다. 아버지 기러기와 아들 기러기의 대화는 이와 같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는 시적 구조는 종종 예상한 것 혹은 알맞은 것과 다른 결과로 이어지는데, 이 경우에도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 경우를 상황적, 구조적, 극적 아이러니라고도 한다.

 

  집을 나서는데 옆집 새댁이 또 층계를 쓸고 있다.

다음엔 꼭 제가 한 번 쓸겠습니다.

괜찮아요, 집에 있는 사람이 슬어야지요.

그럼 난 집에 없는 사람인가?

나는 늘 집에만 처박혀 있는 실업잔데

나는 문득 집에조차 없는 사람 같다.

나는 없어져 버렸다.

―김영승, 「반성 99」

 

  ‘실업자’란 ‘경제 활동에 참여할 연령의 사람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일반적인 경우 실업자들은 대체로 집에 있게 마련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집에서 일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직업을 가진 사람은 집밖에서 일을 한다. 아마 새댁의 남편도 일을 하러 당연히 집을 나갔을 것이다. ‘나’는 “늘 집에만 쳐박혀 있는 실업자”지만 새댁이 바라볼 때 집을 나서고 있는 ‘나’는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층계를 쓸고 있던 새댁을 보고 ‘나’가 “다음엔 꼭 제가 한 번 쓸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새댁이 “집에 있는 사람이 쓸어야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밖에서 일을 하고 집에는 여자들이 가사를 책임지고 있다고 새댁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나’는 늘 층계를 쓸고 있는 새댁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다음엔 꼭 제가 한 번 쓸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가 이어진다. 새댁의 진심과는 무관하게 사회의 보편적인 통념이나 일반적인 상황이 상황을 악화시킨다. 실업자이지만 집에 있는 ‘나’는 새댁의 말에 의해 갑자기 집에 없는 사람이 되고만 것이다. 옆집 새댁의 말로 인해 이와 같은 이상한 상황이 생기자, ‘나’가 지니고 있을 모종의 자의식이 개입한다. 실업자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통념은 기어이 ‘나’를 “집에서조차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급기야 “나는 없어져 버렸다”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낳게 하였다.

 

  아이러니는 표면적 진술에 비해 실제 의미나 실제 의도가 다를 때 발생한다. 아이러니에서 문면에 드러나 있는 것은 보편적인 개념이며 숨어 있는 것은 보편적인 개념을 뒤집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시에 등장하는 주체와 시를 읽는 독자 사이에 긴장이 조성된다. 이런 측면에서 아이러니는 기지奇智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말하자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자의 특별한 노력이 요구된다. 독자는 시적 구조의 상충관계를 발견하고, 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분석적인 정신과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3. 역설의 의미와 그 양상

 

  역설逆說은 흔히 패러독스paradox라고 부른다. 패러독스는 ‘의견’을 뜻하는 그리스어 ‘doxa’와 ‘거스른다’는 뜻의 접두어 ‘para’가 결합해서 생긴 말이다. 그런데 이 역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진술doxa이 먼저 있어야 한다. 합당한 진술을 전제하고 난 뒤에야 그것과 반대되는 역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흔히 어떤 상황이 정말로 마음에 들 때, 사람들은 ‘너무 좋아서 죽을 지경이다’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통설과 상식적 판단에 부합하지 않는 모순어법이다. 좋다면 죽을 이유가 없으며, 또 죽어서도 안 된다. 사실 이 표현은 ‘어떤 상황이 너무 좋다’라는 합당한 진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좋아서 죽을 지경이다’와 같은 표현을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한다. 그 이유는 합당한 진술이 언술 주체의 특별한 감정 상태를 정확하게도 효율적으로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합당한 진술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어서 그다지 독창적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역설은 합당한 진술에 비해 훨씬 독창적이고 주관적이다.

 

  여기서 역설적 표현은 다시 1차적 사실과 2차적 사실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1차적 사실은 대체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계에 속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 지식이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계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지식이라고 부르며, 이 기준을 잣대로 하여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이해한다. 그런데 합당한 진술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것이어서 불완전한 지식에 해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를 벗어난 것들도 상당히 많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으며, 따라서 이를 단일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이에 비하여 2차적 사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이 세계에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많으며,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없는 것들도 매우 많다. 예를 들어 유치환의 시 「깃발」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만 그 의미를 오해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유치환, 「깃발」 부분

 

  ‘아우성’이란 ‘떠들썩하게 기세를 올려 지르는 소리’를 뜻한다. 1차적 사실로서의 아우성이라면 당연히 소리가 없을 수 없다. 그런데 2차적 사실의 세계에서는, 말하자면 그 소리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어떤 영역의 것이라면 “소리 없는 아우성”도 충분히 가능하다. 사람은 돌고래나 박쥐가 내는 초음파를 들을 수 없으며, 주파수와 매우 낮은 소리도 듣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음파의 범위(가청주파수)는 20Hz 이상에서 20,000Hz 이하 영역의 진동 횟수이고, 소리의 크기는 4~130phon 정도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이 범위를 벗어난 음파와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우성의 소리가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하거나 크다면,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1차적으로 보기엔) 사실이 아니지만, 자세히 보면 사실(2차적으로 사실)이 되는 경우다. 이 세계에는 보편적 지식으로 이해되는 1차적 사실보다 그것을 벗어난 2차적 사실에 해당하는 것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언어는 거의 예외 없이 1차적 사실을 지시하며, 2차적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대부분의 시적 격설이란 바로 이러한 2차적 사실들의 세계를 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언어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시는 종종 그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위험하고 의미 있는 시도를 한다. 거기서 놀랍고 아름다운, 때로는 감동적인 시적 진실이 만들어진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람을 잘 보여주는 다음 시에서 역설적인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싸릿재 너머

비행운 떴다

 

붉은 밭고랑에서 허리를 펴며

호미 든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남양댁

소리치겠다

 

“저기 우리 진평이 간다”

 

우리나라 비행기는 전부

진평이가 몬다

―윤제림, 「공군소령 김진평」

 

  “우리나라 비행기는 전부/진평이가 몬다”라는 마지막 연이 역설로 이루어져 있다. 보편적인 상식에 어긋나는 이 표현은 사실일 수도 있는 진술 “저기 우리 진평이 간다”라는 ‘남양댁’의 말까지 역설이 되게 하였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측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공군소령을 아들로 둔 ‘남양댁’은 그 자식이 이 세성에서 가장 자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이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비행기를 아들인 ‘진평’이가 조종할 수 있는 것으느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밭일을 하던 ‘남양댁’은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가기만 하면 “저기 우리 진평이 간다”고 크게 소리친다. 힘들게 농사일을 하면서 키운 자식이 보란 듯이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으니 여하한 말로 그 자랑스러움을 표현할 수 잇겠는가. 사정이 그렇다면 하늘에 비행기만 보이면 아들이 몰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양댁’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남양댁”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합리적인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 말하자면 이 시는 자식을 사랑하는 지극한 어머니의 마음을 역설의 언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역설은 보편적인 일상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道可道 非常道’(『도덕경道德經』), ‘色卽是空 空卽是色(『반야심경般若心經』)처럼 신비스럽고 초월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역설적인 표현들이 철학이나 종교에서 자주 쓰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서정주, 「견우의 노래」 부분

 

  연인간의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가능한 것인데 그 사랑을 위해서 이별이 필요하다는 시적 진술은 보편적인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드물게 미래의 사랑을 얻기 위해 현재의 이별을 과감하게 수용하기도 한다. 현실의 모든 사랑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현재의 이별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우쳐주기도 한다. 그 일이 견우와 직녀에 얽힌 이야기에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것과는 반대로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에서처럼 현실적 이별과 사랑의 부재가 항상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비록 현실에서의 이별이 사랑을 방해하지만, 사랑은 현실적인 상황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와 같은 생각으로 사라잉 더욱 공공해지기도 했음을 우리는 여러 사례를 통해 알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감정은 단순한 사실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이 보여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부분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마당에 그 어떤 불만이나 슬픔도 보이지 않은 채 고이 보내주겠다는 이의 심사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이 그 대상이니 쉽게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이의 태도를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이의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을 아예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종종 감정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김영승, 「반성 16」

 

  술에 취해 쓴 자신의 글씨를 술이 깬 상태에서는 알아보지 못하더니 술을 다시 마시자 그 글씨가 보이더라는 내용의 시다. 보이지 않던 글씨가 술을 마셔야 보인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술은 인간의 정신활동을 둔화시켜 어떤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술을 마셨더니 글씨가 보인다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즉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사실이다. 이 시는 역설적 상황을 통해 이성적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상의 모든 상황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에 비해 사고의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의 판단이 때로 정확한 경우도 있고, 인간보다 동물의 직감이 뛰어난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보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 더 좋은 판단을 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눈으로만 읽으려고 할 때 알아보는 글씨가 마음으로 읽을 때 갑자기 보일 수도 있다. 역설이란 이처럼 깊이 있는 해석의 과정을 거쳤을 때, 그 의미가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는 진술을 말한다. 역설은 공통된 견해와 상반되는 진술을 통해 새로운 의미나 예상하기 어려운 감정을 전달한다.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通의

다정함을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날」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그날」의 마지막 구절은 보편적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역설적 상황은 2차적 사실에 가깝다. 1차적 사실의 세계에서는 누군가 병이 들면 반드시 아프게 마련이다. 그런데 “전방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는 구절이 ‘모두 병들었다’는 진술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런 일이 없이 평온하고 완벽한 세상인데, ‘모두’가 병이 들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문장을 다시 읽어보아야 할 필요가 생긴다. 만약 병이 들었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분명 언어로 설명할 수 없거나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령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신의 삶을 “솎아내는 것”과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의 하늘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진술은 누구도 아프다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프다는 감각조차 잃어버린 삶에 대한 비극적 표현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든 후자의 경우든, 그 구절 바로 앞에 놓인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구절을 이해하는 데는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이 시가 놓여있는 시대적 배경을 참조한다면, 처참한 삶을 역설적 표현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설은 겉으로 보기에는 명백히 모순되고 부조리하다. 하지만 표면적인 논리를 더나 자세히 생각하면 그 진술이나 상황이 진실에 가까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설에서 드러난 것은 매우 상식적인 개념이다. 역설은 그 진술이 모순적인 상황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에 포함된다. 근시안적인 과학적 사실, 고식적인 인과율을 벗어난 지점에 삶의 진실이 있다. 역설은 바로 이런 것들을 노리고 있다.

 

 

 

4. 삶의 아이러니와 역설

 

  아이러니와 역설에는 두 개의 문맥이 존재한다. 그런데 두 문맥 중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고 나머지 하나는 숨어 있다. 숨어 있거나 전제되어 있는 문맥이 드러나 있는 문맥과 만나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발생한다. 아이러니와 역설의 구분이 모호한 이유는, 이처럼 드러난 표현과 드러나지 않은 표현이라는 이중적인 문맥 때문이다. 이중적인 문맥에 의해 모순이 생기며, 우리는 거기에서 새로운 시적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현대사화에서 아이러니와 역설은 강조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현실을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가 이 세계와 우리의 삶을 모두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언어는 모순적으로 이 세계와 우리의 삶을 모두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언어는 모순적으로 이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세계가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 엄연한 사정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다음 작품에서 ‘지평선’을 두고 나누는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는 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난생처음 지평선을 마주한 아이에게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말했다 아들아 나도 지평선은 처음이구나 그러자 아이가 물었다 지평선이 뭐야? 슈레버는 곡식의 낟알을 살찌우는 가을볕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하늘과 땅이 맞닿아 만든 선 그것이 지평선이란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물었다 지평선에 갈 수 있을까? 슈레버는 황금빛 평야를 가로지르는 실개천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다. 그러자 아이가 되물었다 지평선에 가면 지평선을 밟은 수 있을까? 슈레버는 해넘이를 등지고 홀로 날아가는 홍부리황새의 날갯짓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평선에 가면 지금이 지평선은 사라지고 또다른 지평선이 멀리 보일 거란다. 그러자 아이가 또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지평선에 결국 갈 수 없는 거 아냐? 슈레버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에 점점이 흩어져 이따금 허리를 펴는 농부들의 기지개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가가는 만큼 지평선은 밀려나며 멀어질 거란다. 그러자 아이가 물었다. 그렇다면 아빠가 거짓말한 거 아냐? 슈레버는 느긋하게 물결을 만들다가 사라지는 곡창지대의 여린 하늬바람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들아 나도 지평선은 처음이구나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좀처럼 해가 질 것 같지 않은 서녘의 시간 속에 아이와 함께 서 있었다 슈레버는 옆에 선 아이에게 한발짝 다가섰지만 아이는 그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임경섭, 「지평선」

 

  아버지 다니엘 파울 슈레버와 그의 아들은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지평선을 두고 나누는 대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지평선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언어는 언제나 무엇에 대한 언어며, 까닭에 언어는 어떤 전제와 문맥에 구속되어 있다. 현실을 담거나 지시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시 역시 이와 같은 모순적인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아버지가 사용하는 말에서 쉽게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말의 아이러니가 단지 인식의 차이만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발견되는 말의 아이러니가 결국엔 삶의 아이러니와 역설로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1연 첫 부분에서 아버지 슈레버는 아들에게 “아들아 나도 지평선을 처음이구나”라고 말한다. 역시 지평선이 처음이 아들은 “지평선이 뭐야?”라며 아버지에게 궁금한 듯 묻는다. 역시 지평선이라는 사실과 의미를 아예 모르는 아들이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저기 하늘과 땅이 맞닿아 만든 선 그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아이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지평선에 갈 수 있을까?”라고 아버지에게 재차 묻는다. 아버지 슈레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며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여기서 “충분히 가능한 일”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지평선에 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아버지 슈레버는 아들에게 눈앞에 보이는 지평선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한편으로 아버지 슈레버가 아들에게 지평선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아버지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상황이 변한다. 아들이 “지평선을 밟을 수 있을까?”라고 묻자 아버지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지평선을 밟아본 경험이 없는 아버지는 당황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을 아들이 한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까지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슬며시 거둬들이며 “지평선에 가면 지금의 지평선은 사라지고 또 다른 지평선이 멀리 보일 거란다”라며 자사하게 설명한다. 아들이 “지평선에 결국 갈 수 없는 거 아냐?”라며 아버지에게 따져 묻자 갑자기 상황은 역전된다. 경험이든 지식이든 아들보다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을 아버진 슈레버는 머쓱해지게 된 것이다. 이제 지평선에 대해서조차 아버지 슈레버는 아들에게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빠져버렸다. 급기야 아버지는 “다가가는 만큼 지평선은 밀려나며 멀어”지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대화의 첫머리에서 보여주었던 자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고 만다. 아들이 “아빠가 거짓말 한 거 아냐?”라고 대들자 아버지는 “아들아 나도 지평선은 처음이구나”라며 완전히 두 손을 들고 만다. 1연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들아 나도 지평선은 처음이구나”라는 아버지의 말은 동일한 형식이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아버지와 아이가 지평선에 대해 서로 나누는 대화는 우리의 편협한 생각이 지니는 문제점을 매우 잘 보여준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알고 있는 세계란 결국엔 언어로 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무서운 의미가 여기에 숨겨져 있다. 이 시는 아버지의 고백을 통해 자신이 언어로만 알고 실제로는 모르고 있던 사실을 다시 언어를 통해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매우 흥미롭게 보여준다. 1연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만 2연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2연은 1연에서 확인한 말의 아이러니가 실상은 삶의 아이러니이자 역설이었음을 아버지와 아들의 행동으로 보여준다.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다시, 좀체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은 저녁 시간에 아들과 함께 서 있다. 1연의 말의 아이러니가 지평선이라는 공간의 무대에서 펼쳐졌다면, 2연은 “서녘의 시간”이라는 공간과 시간이 확장된 무대에서 삶의 아이러니와 역설을 넌지시 일깨워준다.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 슈레버 역시 아들과 친해지기 위해 “한발짝 다가섰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물리적 다가섬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현상학적 친밀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가 가까이 오는 순간 멀어지게 된다.(“그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애정어린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지만 아들은 그 마음을 사랑으로만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때로는 애정이 간섭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아버지의 마음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진실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역설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 세계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세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보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아이러니와 역설은 이와 같은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해준다. 또한 한 개념을 다른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이 어떤 사실성에 속하며, 이러한 사실성이 무수히 많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아이러니와 역설은 이 세계가 동일한 질서로 이해되는 것에 대한 완곡한 부정이다. 많은 현대시는 이와 같은 아이러니와 역설에 기대고 있다.

 

  삶의 진실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진리를 발견하려는 깊이 있는 관찰에서 아이러니와 역설이 만들어진다. 사색적 삶은 마구 밀려들어오는 물질적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사용한다. 어뭇거림이 늘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동이 단순한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하기도 하다. 아이러니와 역설은 우리의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사유에 여유를 주며, 조금 더 천천히 느리게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아이러니와 역설을 통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 충동을 따르는 것이 일종의 자기몰락이며 자기탈진일 수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여태천, 「아이러니와 역설」, 김종훈 외『현대시학』, 서정시학,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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