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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것/김행숙


시적인 것과 시


‘시적인 것’은 ‘시’라는 문학 장르를 가로지른다. 시적인 것은 일상회화, 문자메세지, 카톡kakao, 트윗tweet 들 속에서도, 다양한 서사물 가운데서도, 15초 예술이라 불리는 영상광고물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시적인 것은 시라는 장르 바깥에서, 특히 이미지 산업의 전면적인 확산에 힘입어 풍요롭고 현란하게 실현되고 있다. 외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앞에 놓고서 ‘시적이지 않다’고, ‘비非시적’이고 ‘반反시적’이라고 당연스레 말할 수 있다.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자: 83. 4. 1. ~ 지: 83. 5. 31.

―황지우, 「벽 1」


우리는 벽에 나붙어 있는 공문을 그대로 옮긴 듯한 이 시에서 ‘무릇 시란 이런 것이지’하고 끄덕일 수 있도록 하는 우리의 상식적인 기대지평을 구성하고 있는 시적인 상상력, 서정성, 주관성, 리듬, 상징, 비유, 이미지 등등의 자질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서정시’란 용어는 시, 소설, 희곡으로 문학 장르를 가르거나, 서정, 서사, 희곡, 교술敎述로 분할하거나 간에 시 혹은 서정 장르를 가리키는 큰 갈래 명으로 사용된다. 또한 이 용어는 시 장르 내에서 통상적으로 서정시 실험시 등으로 분류되는 작은 갈래 개념으로도 쓰인다. 이런 용어상이 혼란은 현대시가 서정장르의 개념과 그 조건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우가 많아서 생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의 다양한 양상들은 자주 서정시라는 용어가 간직하고 있는 서정적 기대를 저버린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에 대한 감각과 내적 경험의 순간적 통일성에 기초하고 있는 서정적 비전은 여전히 시적이지만 현대시에 작동하는 다양한 예술 의지들을 한데 그러모을 수 있는 최종 심급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접어두기로 하자. 야콥슨의 비유를 빌려 말한다면, 시작품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기준은 옛 중국 제국의 변경에 못지않게 가변적이다 시에 국경선 같은 선을 그어 놓고 달밤에 보초를 서듯 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시(혹은 문학)는 어떻게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물음이다. 이 존재론적 질문을 통해 우리는 시의 역사성과 맞닥뜨리게 된다. 또한 우리는 장르의 경계까지 의심하고 해체하려는 전위적 시도들까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미 인정된 ‘시적인 것’은 시 안에서 의식적으로 거부당하거나 배반당하기도 한다. 달리 말해서, 시적인 것은 시를 통해 새롭게 발굴되고 재구성된다. 따라서 시적인 것은 시를 통해 한편으론 보존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적극적으로 변화한다. 오늘 ‘시적이지 않은 것’이 내일 ‘시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위의 예에서,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자: 83. 4. 1. ~ 지: 83. 5. 31.”은 벽보에서 시로 옮겨졌다. 이 같은 자리의 전환은 뒤샹이 공산품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미술관에 전시했을 때 극적으로 실현된 바 있다. 미술관에 놓여 있게 된 변기가 그 실용성을 잃어버렸듯이 시 본문의 자리에 놓인 위의 문구는 원래 지녔던 정보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의미 정보가 사라지는 지점에서 미적 정보가 발생한다. 일군의 누군가에게 83년 4월 1일 부처(자自) 83년 5월 31일까지(지至)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 유효했을 법한 지시적 정보 대신, 이를 시집에서 읽는 우리는 군사용어와 경찰용어로 조합된 비非시적인 문구와 시의 연결에서 미학적인 낯설음과 함께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있는 규율권력을 날카롭게 느끼게 된다. 또 어떤 이는 ‘자’와 ‘지’를 붙여 읽으면서 군대문화와 성문화가 교착된 비틀린 풍경을 환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전에 ‘이것도 시야?’와 같은 반응이 충분히 예상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렇지만 ‘이것도 시가 된다’는, 나아가 ‘이것도 시적인 것이 된다’는 주장은 다시 한 번 더 야콥슨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힘을 보탤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주장은 이미 그다지 놀랄 만한 발언이 아니다.


시작품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기준은 비유컨대 옛 중국 제국의 변경에 못지 않게 가변적이다. 노발리스와 마라르메는 알파벳이 가장 뛰어난 시라고 생각하였다. 러시아 시인들은 술 품목표(뱌젬스키), 황제의 의복 일람표(고골리), 시간표(파스테르나크), 심지어 세탁소의 요금표(크루체니흐)에 깃들어있는 시적 자질을 상찬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르포르타지가 소설이나 단편소설보다 더 예술적인 장르임을 주장하고 있는가.


낯설게 하기


우리의 지각작용은 습관화되면서 자동화된다. 이러한 지각작용 속에서는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에, 귀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뭔가를 보고 들었겠지만, 그 무엇도 기억에 남질 않는다.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점점 파도의 속삭임에 익숙해져 그걸 듣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들이 말하는 언어를 거의 듣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지see더 이상 서로를 주의 깊게 쳐다보지는look않는다.” 쉬끌로프스키는 「기법으로서의 예술」에서, 삶의 감각을 되찾고 사물을 느끼기 위해서, 돌을 돌답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예술은 다양한 방법으로 대상에서 지각의 자동화를 제거한다고 했다. ‘낯설게 하기Ostranenie기법’은 그에게서 예술의 일반법ㅈ칙으로 떠오른다. 그리하여 그는 시를 지연되고 뒤틀린 말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날해, 예술기법은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식을 어렵게 하여 지각을 힘들게 하고(제동)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키는(지연) 기법이다. 이 제동과 지연을 통해 이식의 갱신이 이루어진다.


이 제동과 지연의 ‘낯설게 하기’ 방법론으로 어떤 시인은 ‘비문’의 시적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한다. 김언이 자신이 두 번째 시집 『거인』에 붙인 산문에서(詩도아닌것들이―문장 생각) 개진한 비문론非文論을 조금 들춰보자. “한동안 탐색했던 불구의 문장들. 팔다리가 하나 더 있거나 머리가 둘이거나 아무튼 정상과는 거리가 먼문장들. (……) 장애인이 사람이라면 이 문장들도 하나의 문장이라는 생각. 비문에서 문장을 발견한다는 것. 장애인에게서 인간을 발견한다는 것.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언이 “장애인에게서 인간을 발견한다”고 할 때, 장애인‘도’ 인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장애 ‘ 때문에’ 인간이 보이는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문장에 대해서 바로 그렇게 하고자 한다. ‘시적 허용’이라는 시 장르가 가진 관습의 틈새를 실험이 수준에서 자의식적으로 들쑤시고 횡단하면서 시적 언어의 실험적이고 낯선 풍경을 보여주는 어떤 시인들.


‘낯설게 하기’에 도달하는 또 다른 방식 한 가지, ‘낯설게 하기’의 근본적인 목적은 ‘기법’이 아니라 ‘세계’다. 감각에 덧씌어져 있는 관습이 꺼풀을 벗기고, 맨문, 맨살의 감각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적 태도가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시.


내가 신세졌던 이층집의 이층에서

도무지 내려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는 내가 있고, 일본의 주택가에서는 까마귀가 자주 보인다. 까마귀는 생각보다 크구나


놀라울 일이 없는데도 나는 놀란다


창이 넓게 트인 거실에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희박하고 조용한 생활, 이층에서도 같은 것이 보일까? 의문은 가로막히고, 거실의 조도는 최대치에 달했다 거실의 공기는 너무 희박해서 숨 쉬는 일도 어려운 것 같다. 사물들이 자꾸 투명해지는데 그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선명하게


내체 제게 뭐지? 갑자기 그가 물어서

저건 까마귀야. 나는 대답했고


까마귀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또 놀랍다.

―황인찬, 「거주자」


“까마귀는 생각보다 크구나”라고 중얼거리고서는, “놀라울 일이 없는데도 나는 놀란다”. 이 놀람! 나는 갑자기 까마귀가 낯설다. 까마귀는 내 인간적인 생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존재하고, 그 존재 자체가 사건처럼 나를 놀라게 한다. 까마귀는 미학적인 가공 없이 ‘그냥’ 나타난다. 이 시인에게 ‘그냥’ 말하겠다는 것은 미적 망각이 아니라 미적 의지다. 이 시를 찾아 읽을 수 있는 황인찬의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의 표제는 그의 미학을 함축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그는 언언에게 새 옷을 입히는 방식이아니라 언어를 씻기는 방식으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대체 저건 뭐지?”라고 묻는 것, 그리고 “저건 까마귀야”라고 대답하고서는 “까마귀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또 놀라는 것. 목소리를 잃어비린 사물의 침묵이 인간적인 목소리(언어) 너머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여기에 있다.


보들레르는 ’회복기의 환자’에게서 그 순간을 찾았고 그래서 그는 항상 회복기 환자와 같은 상태에 있는 예술가를 꿈꾸었다. 회복기의 환자는 죽음이라는 망각의 강으로부터 살아 돌아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시 기억하기를 열망하는 존재다.


너와 마주치기 전에는

삶이 그러게 놀라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

네가 나에게 창을 던졌을 때

작살에 찔러 허공에 버둥거리는 물고기처럼

눈은 휘둥그레졌고

세상은 놀라움의 광체를 띠게 되었다

죽음을 품고 햇빛을 더 강하게

죽음을 품고 어둠을 더 거칠게

그리고 낯설게 느낄 수 있는

회복기恢復期 병자들이 거울,

거울 속이 해골바가지여,

너와 마주치기 전에는

삶이 그렇게 놀라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

―최승호, 「휘둥그레진 눈」


최승호의 시에서 회복기 병자는 ‘놀람의 능력’을 회복한 자다. 회복기 환자가 마주한 거울은 죽음을 품어서 더 강렬해진 햇빛, 더 거칠어진 어둠을 보여준다. 그 거울은 자신의 익숙한 얼굴에 깊숙하게 파묻혀 있던 “해골바가지”를 낯설게 보여준다. 회복기 환자의 시선에서 예술가의 시선을 발견했던 보들레르는 ‘죽음’을 영유하여 감각적 싱싱함을 회복한 상태에 주목하였다. 예술가는 다시 태어난 사람의 감각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기억하는 상태에 자신을 놓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낯설음을/더욱 낯설게 느낄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예술가가 점유해야 할 감각적 위치라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회복기 환자의 감각이 어떤 면에서 보자면 모든 것을 처음보기 때문에 항상 도취되어 있는 ‘아이’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아이의 지각은 자동화되고 관습화되기 이전의 상태다. “미美는 언제나 엉뚱하다”고 보들레르는 말했다.

이윤기의 소설 「나비넥타이」의 한 대목에서 우리는 엉뚱한 ‘아이의 정신상태’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암시 받을 수 있다. 노수란 인물이 이런 얘길 들려준다. 이발소에서 읽은 만화책 얘기. “정말 만화 이야기다. 대학에서 연극부원을 선발하는데 말이다. 선발 <오디션 룸> 한가운데 조그만 탁자 하나, 탁자 위에는 사과가 한 알 놓여 있다. 주위에는 상급학년 부원들이 주욱 둘러앉아 있고……. 신입생 지원자는 하나씩 그 방에 들어와 상급생 심사위원들이 보는 가운데 그 사과 앞에서 어떤 연극적인 반응, 어떤 예술적인 반응, 말하자면 어떤 창조적인 반응을 어떤 수준까지 보이는가에 따라 당락이 결정된다.” 자, 노수가 들려주는 만화 칸 속으로 들어가 심사위원의 자리에 앉아보자.


한 남학생이 들어온다. 이 학생은 자신을 로미오, 사과를 줄리엣으로 상정하고 현란한 수사학이 곁들여진 사랑을 고백한다. /너는 아니고…….

또 한 학생이 들어온다. 이 학생은 자신을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 사과를 선악과로 가정하고 대사를 읊는다. 이 학색의 상상력은 사과에서 출발, 자기가 낙원에서 추방된 것이 과연 이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사과와 이브는 신의 각본에 동원된 애꿎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지를 논증하는 데까지 비약한다./너도 아니고…….

또 한 학생이 들어온다. 이 학생은 사과 앞에서 사과가 연상시키는 역사적인 사건을 두름으로 꿰어낸다. 에덴의 사과, 불화의 여신 이리스가, 미스 그리스라고 생각하는 여신이 집으라면서 아프로디테와 아테네와 헤라 앞으로 던진 사과, 이로써 트로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고 만 그 <디스코드(불화)>의 사과, 윌리엄 텔이 아들이 머리 위에 올리고 활을 쏘아야 했던 <레지스탕스(저항)의 사과, 만유인력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뉴턴의 사과 타령을 줄줄이 이어낸다. /너도 아니고,/ 그 밖에도 많은 학생들이 들어온다. 너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학생이 들어온다. 아니다. 사실은 마지막 학생이 아니다. 그러나 그 학생의 등장과 함께 내가 만화책을 덮어별ㅆ으니까 마지막 학생이다. 그 학생은 천천히 걸어 들어와 가만히 사과를 보고 있다가 덥석 집어 들고는 우적우적 베어 먹기 시작한다. /바로 너다…….

웃기지?


노수에게 이 장면은 그의 존재론적 변신을 가능하게 한 계기로 얘기된다. “아, 나는 남들이 껍데기로만 사는 것을 본받으려 했구나, 그걸 본받으려고 하다 잘 안되니까 자꾸만 그거 드러나는 것을 숨기려 했구나. 그러느라고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렇게 망설이고, 그렇게 더듬거렸던 것이구나…….” 한 개의 사과 앞에서 그것이 유구한 상징적 의미망에 미리 누죽 들지 않고 천진한 아이처럼 만지고 먹어보는 것. 그리하여 그 순간에 내가 느끼는 사과를 표현하는 것, 그래도 된다는 것, 그게 진짜 ‘나의 사과’라는 것. 그것이 ‘나의 언어’라는 것, 노수는 바로 여기에서자신의 실존적 자유를 찾게 된다. 그는 자신의 언어를 새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배운 정의를 폐기하고 내 느낌으로 내 것으로 내가 만나는 단어를 다시 정의했다. 사람? 조만간 끝날 미끄럼……. 믿음? 가역 반응……. 공포? 무방비 도시……. 증오? 나비 넥타이……. 물? 죽음……. 불? 잠……. 바위? 존재론적 시한 폭탄…….” 이 장면에서 누수는 시인에 다름 아니다.

어떤 한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 한 귀퉁이에다 “자, 밤은 길고/자신을 평가하는 모든 시인은/자신의 고유한 사전을 가져야만 한다”는 파라의 말을 적어놓고 있다. ‘자신의 고유한 사전’이 에센스 국어사전 같은 것일 리는 없겠지.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을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이 시인의 개인사전엔 ‘봄’이라는 단어가 “놀라서 뒷걸음질치다/맨발로 푸른뱀의 머리를 밝다”로 풀이된다. 이 징그럽고 싱싱한 동물적인 봄의 감각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는 것, 그런 봄의 감각을 처음으로 맛보는 것, 그것이 시적 경험일 것이다. 당신의 사전에서는 어떤 봄이 깨어날까? 일곱 사람의 봄은 일곱 개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아니, 한 사람의 봄도 일곱 개, 여덟 개의 모습을 할 것이다. 매순간 봄은 다르게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봄은 매번 새로운 봄이다. 내 느낌으로 내 것으로 내가 만나는 언어를 ‘새로’ 정의하고 발명하는 것 이것은 보들레르가 ‘어린이의 감각’을 예찬한 이유에 닿아 있다. 우리도 한번 해보자.

그리고 배수아는 ‘이방인 논리’를 제안한다. 그녀는 쾌활한 이방인의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녀가 왜 ‘이방인’의 위치, ‘바깥’의 시선을 글 쓰는 자신에게 요청하는지,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얘기했다.


‘이방인’됨을 즐기고 싶다면, “나는 지금 외국에 있다. 나는 이제 금방 비행기에서 내려 이곳에 방을 구했다. 나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이곳의 모든 광경은 나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규정한다. 단지 마음을 그렇게 먹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이방인’이 되면 자신에게 피부처럼 익숙했던 사물이나 현상들이 좀 다른 각도로 보이기 시작한다. 항상 보아오던 아파트 계단이나 집 앞 버스 정류장을 사진으로 찍고 싶을 정도로.

―배수아, 「동물원 칸트」 전문


모호성


“자신에게 피부처럼 익숙했던 사물이나 현상들이 좀 다른 각도로 보이기 시작”하면, 그래서 다른 각도로 사물인 현상을 드러내면, 이 다른 앵글에 맞춰져 있지 않은 독자들은 낯설음과 더불어 어떤 종류의 모호함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모호함은 경우에 따라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일 수도 있고, 다소 불편한 것일 수도, 다만 짜증나는 것일 수도 있다. 지각작용에 제동이 걸리고 판단은 자꾸만 지연된다.

엠프슨W. Empson이 모호성을 시적 가치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다의성을 존중해서다. 과학적·논리적 언어가 사실이나 대상을 1:1로 가리키는 ‘지시적(외연적) 언어’라고 하면, 이와 비교할 때 시어는 대체로 한 낱말을 통해 가능한 한 많은 느낌과 의미를 환기시키는 ‘함축적(내포적)언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모호성은 시어가 내장하고 있는 풍요로움에서 발생한다.


또한 모호성은, 시어가 매우 개인적인 언어이며 구체적인 언어라는 데서도 발생한다 한 알의 사과에 덮어씌워져 있는 신화적 역사적 의미를 걷어내고, 사과의 사전적 의미도 괄호 치고, 내가 보고, 내가 만지고, 내가 냄새 맡고, 내가 우적우적 베어 먹으면서 내가 만난 사과로부터 예술적 사과는 탄생한다. 이 사과는 시인이 특수하고 새로운 느낌과 의미를 부여한 언어다. 이제 갓 알에서 깨어난 언어이다. 이 사과에서 날개가 돋게 될지도 모른다.


시는 산문에 비해 의미의 전달보다 언어 자체의 뉘앙스와 미감을 존중한다. 의미론적인 소통에 대한 고려는 시에서 부차적일 때가 많다. 의미론적으로, 산문이 명쾌하고 선명한다면 시는 모호하다. 시는 요약될 수 없다. 데생화가 드가와 시인 마라르메의 대화다. 드가가 말하길, “나는 머릿속에 많은 관념을 가지고 있어, 나도 언젠가는 시를 쓸 수 있을 거야” 이에 대해 말라르메가 응수한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친구야, 시란 관념으로 쓰는 게 아니라, 낱말로 쓰는 거야” 시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 말의 울림과 리듬에 이끌린다. 그런 뜻에서도 시는 감각적이다.


모호성은 단어의 수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낱말과 낱말, 구와 구, 행과 행, 연과 연의 예기치 못한 배치에서 우리는 종종 당혹감을 느끼거나 묘한 해방감을 맛보기도 하며 특이하고 엉뚱한 발견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로 이때 ‘시적 비약’이라는 말을 쓴다.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의 사슬이 여기저기에서 툭툭 끊겨져 버린다.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 ‘그래서’ 등등의 접속사를 총동원해서 연결시켜 본 후에도 우리는 종종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 경험 또한 즐거운 것일 수도 불편한 것일 수도, 짜증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때로는 어떤 불편함과 짜증은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시는 종종 새로운 소통 코드를 제출한다. 이 코드를 아주 느리게 통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뜻밖에도 전혀 새로운 세계와 접촉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그 과정이다.


정보이론에서는 美를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최적이 관계’로 규명한다. 변수가 너무 많아 주가변동이 극심할 때, 주식시장의 엔트로피는 높아진다. 상황이 예측하기 어려울수록 엔트로피는 커지게 되고, 정보량도 그만큼 커진다. 가령, 애정의 구도가 2인으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3인, 4인, 5인이 얽혀서 짜여지는 경우 스토리 전개는 복잡해지게 된다. 다양한 조합이 예상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이 구도에서 보다 많은 정보를 갖는다는 뜻이다. 반면 ‘내일 해가 뜬다’는 예상은 아무런 정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결과가 뻔할 때보다 귀추를 예측하기 힘들수록 더 많은 정보를 내포하게 된다. 불확실한 정보가 더 많은 정보라는 얘기다. 이를 우리의 논의에 적용시켜 보면, 언어와 대상이 1:1로 짝지어지는 지시적 언어에 비해, 1:多의 관계를 지탱하는 함축적 언어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더 높은 엔트로피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시적 비약’은 논리적 연결에 비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더 높은 엔트로피를 보유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적 쾌감은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최적의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엔트로피가 너무 높아지면, 시를 읽는 일이 다만 짜증스러워지고 고통스러워진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최적의 관계를 정량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최적의 관계’ 또한 예측 불가능하다고, 달리 말해 엔트로피가 높은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둠에 대해, 우주의 암흑물질에 대해 매혹을 드러내는 한 편의 시에서 모호성은 존재의 비밀과 우주의 신비를 우리로 하여금 간직할 수 있게 해주는 본질적인 요소다. 이제, “아, 얼마나 다행인가/어둠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은”이라고 노래하는 나희덕의 시 「어둠이 아직」을 읽어볼 차례다.


얼마나 다행인가

눈에 보이는 별들이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이

별들을 온통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둠을 뜯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별은 어둠의 문을 여는 손잡이

별은 어둠의 망토에 달린 단추

별은 어둠의 거미줄에 맺힌 밤이슬

별은 어둠의 상자에 새겨진 문양

별은 어둠의 웅덩이에 떠 있는 이파리

별은 어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입술


별들이 반짝이는 동안에도

눈꺼풀이 깜박이는 동안에도

어둠의 지느러미는 우리 곁을 스쳐가지만

우리는 어둠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지

뜨거운 어둠은 빠르게

차가운 어둠은 느리게 흘러간다지만

우리는 어둠의 온도와 속도도 느낄 수 없지


알 수 없기에 두렵고 달콤한 어둠,

아, 얼마나 다행인가

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은


어둠이 매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알 수 없기에 두렵고 달콤한 어둠”은 꿈과 비밀의 바탕색이며 보자기다. 우주가 그토록 매혹적인 것도 어둠에 싸여 있고 어둠을 펼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이 눈에 보이는 별들을 온통 둘러싸고 있으므로, 우주는 우리의 꿈을 부풀게 하고 비밀의 화원으로 이어지는 샛길들을 상상하게 한다. 미지와 무지의 영역, 모호성의 장소는 우리의 영혼을 굶기는 곤궁한 부엌이 아니라 딱딱해진 영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뜨거운 자궁이다. 모르는 것이 없다고 느낄 때, 그 인간의 영혼은 가장 빈곤하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고양될 때 우리는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되겠지.


그러므로 황현산의 책 제목처럼 “밤이 선생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황현산이 생전에 septuorl이라는 아이디로 SNS 공간에 남긴(2014. 11~2018. 6) 트윗, 140자 짧은 글들의 모음집 제목이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라는 것은, ‘모르는 것’을 지적 패배가 아니라 시적 가능성으로 사유했던 비평가에게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분석은 분석되지 않는 것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거기에 한 정신의 고통이 있고 미래의 희망을 위한 원기가 있다. 분석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 원기를 사랑하였다”고, 그는 자신의 첫 비평집 『말과 시간의 깊이』의 머릿글에 썼다.


김수영은 그의 대표적인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작詩作에 있어서 ‘모호성’은 그의 정신구조의 상부上部중에서도 가장 첨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호성을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로 간주했다. 그가 말하는 혼돈은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이 세계가 자유를 보유하는 한, 거기에 따르는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그레이브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ᅟᅩᇂㄴ란이 없는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문맥에서 그는 1968년에 쓰인 이 글에서 또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우리의 주변에서는 기인이나 바보얼간이들이 자유당 때하고만 비교해 보더라도 완전히 소탕되어 있다. (……)서울에 내가 다니는 주점은 문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이름난 집인데도 벌써 주정꾼다운 주정꾼 구경을 못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된다. 주정은커녕 막걸리를 먹으러 나오는 글쓰는 친구들의 얼굴이 메콩강변의 진주를 발견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 이러한 ‘근대화’의 해독은 문학주점에만 한한 일이 아니다.” 왜 모두들 말을 조심하고 시간을 아껴야 할까. 죽은 시인의 사회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모호성은 혼돈과 자유에대한 긍정에 잇닿아 있고, 혼돈과 자유를 제약하는 경직된 사회에 대한 저항 논리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특히 정치적 부자유를 문제시하게 될 때, 그의 말대로 “모호성의 탐색은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르”게 된다.


숨은 꽃과 곰팡이꽃



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濟州海女도

제일 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詩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 두고 바다바래어 詩人인 것을……

―서정주, 「詩論」


제일 좋은 것을 ‘거기’에 두고, ‘여기’에서 동경하는 것을 서정주는 시인의 태도로 생각했다. 그는 한 산문(「머리로 하는 시와 가슴으로 하는 시」)에서, 한용운의 「수繡의 비밀」이라는 시의 이런 구절을 인용한 일이 있다. “이 적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시 속의 여인의 심리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여인은 객지에 가 있는 애인에게 보낼 옷을 해 놓고, 마지막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있는데, 이걸마저 끝내 버리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마음의 다리를 놓고 있는 일이 끝나버릴까를 겁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여인의 심리에 빗대어, 시인이 겁내야 할 것도 무엇을 다 못하고 끌고 가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아니라, 참으로 냉큼 다 먹어치워 버리거나 끝내 버리고 마는 일이라고 적었다. 이 마음의 결을 서정주는 ‘매력과 절제 사이’라고 말한다.


이때, ‘이상적인 것’, ‘최상의 상태’에 대한 믿음은 그보다 낮은 자리에서 유지된다. 내가 놓여 있는 자리가 비록 비천하고 비루하다할지라도 지극한 진실과 아름다움이 존재 부정되지 않는다. ‘이 자리’(현실)는 ‘저 자리’(이상)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낭만적인 믿음이 흔들릴 때, 도저히 ‘저 자리’가 보이지 않을 때, 어떤 작가들은 글쓰기에 위기를 느낀다.


한 소설가는 이렇게 고백한다. ‘꽃이 숨어버렸다’(양귀자, 「숨은 꽃」) “문제는 ‘슬픔도 힘이 된다.’는 진술이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세상의 변화에 있었다. 세상이 텅 비어버린 듯했다. 써야 할 것이 우글대던 머릿속도 세상을 따라 멍한 혼돈에 빠져 버렸다.” 이제, ‘제일 좋은 것’은 거기에 두고, 그리움의 힘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제일 좋은 것’은 거기에 두고, 그 그리움의 힘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작가는 이제, “그 숨어버린 꽃 속으로 삼투해 들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숨어 있는 꽃들의 꽃말 찾기”. 「숨은 꽃」의 작가는 우리의 속악한 현실논리에 의해 파묻혀 버린 꽃 속으로 삼투해 들어가는 일을, “와해된 세계의 페허 어딘가에 숨어 사는 거인”의 초상으로 형상화한 김종구란 인물의 입을 빌려, 흰자위가 아니라 검은자위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 이치와 연결시킨다.


“소설을 팔아 밥을 먹는다구요? 아니, 아직도 그런 것을 읽는 사람이 있답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소설인가요? 작가선생님, 이런 말은 어떤지 한번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인간의 눈을 만들 때 흰자위와 검은자위를 동시에 만들어놓고도 왜 검은자위만 세상을 보게 만들었는지, 그거에 대해서 선생님은 혹시 아십니까? 아, 이거야 나도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긴데, 그게 말예요. 세상을 보는 일이야 우리 같은 떠돌이들 말고 선생님 같은 분들에게 떠맡겨진 숙제 아닙니까. 그러니 애시당초 편하게 앉아서 해드라이트 비춰놓고 들여다보듯 그렇게 수월한 일은 아닐 거라 이 말씀이죠. 흰자위 놔두고 검은자위로 세상을 보랄 적에는 다 그만한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다른 한 소설가의 작품에서 우리는 ‘곰팡이꽃’이라는 다소 생경한 표현을 만날 수 있다.(하성란, 「곰팡이꽃」 쓰레기장을 조사하여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생활 실태를 알아보는 ‘가볼러지garbology’라는 사회학에서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곰팡이꽃」이라는 소설 속에서 한 남자는 “쓰레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쓰레기야말로 숨은그림찾기의 모범답안이다”고 중얼거린다. 이 쓰레기에서 피는 꽃이 곰팡이다. 쓰레기는 왜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내 쓰레기봉투가 해부되리라곤 좀처럼 상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문가를 가리거나 포장하지 않고 마음 놓고 버릴 수 있다. 가령, 어제 결별한 애인의 찢어진 편지나 사진 같은 것도, 그러니, 밤에 아파트 공동 쓰레기통에서 쓰레기봉투를 몰래 주워 와서 쓰레기를 헤집으면서 노트에 그 내용물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한 남자가 우리에게 엽기적이고 무섭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남자의 노트엔 아파트 주민들의 자질구레한 일상과 비밀이 기재된다. 이 남자는 중얼거린다.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진실이란 것은 쓰레기봉투 속에서 썩어가고 있으니 말야.” ‘곰팡이+꽃’이라는 조어의 역설은 여기에 놓여 있다.


‘곰팡이꽃’이라는 말은 현대예술의 어떤 핵심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메타포가 될 수도 있겠다. 현대예술은 우리를 추하고 고통스러운 경험 속으로 자꾸 밀어 넣는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불쾌하고 괴롭게 한다. 이 세계가 추하고 끔찍하다면, 그 속에서 고통의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온다면 이토록 야만적인 세계에 대한 어떠한 질문이나 회의도 없이 ‘아름다운 가상’을 통해 현실을 힐링하고 유토피아로 초월하려는 태도는 위선적이거나 순진한 미학적 포즈로 전락하고 만다. 브레이트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 하였고,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치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 했던 것에서, 그러나 인간은 서정시의 불가능성에 갇히고만 것이 아니라 시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더듬어나갔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시는 ‘쓰레기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한다. 이쯤에서 성기완의 「푸른 큰 쓰레기통의 뜻을 지나며 묻는 새벽」이라는 시를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쓰레기통의 뜻”이란 게 뭘까. 시인은 질문만 던져 놓은 것 같다.


새벽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아직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간이라 말하겠어 대신 나는 푸른 큰 쓰레기통을 지나며 내음을 맞지 그것들이 퍼르스름한 대기 속을 엎드려 있어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라 일컬어지는 형광 조끼 입은 아저씨들이 큰 젓가락으로 그 시체를 후비고 있어 심호흡을 할까 나는 세기말의 부랑자 걷고 또 덜어도 대답 없는 저 푸른 큰 쓰레기통에 왜 도대체 왜? 새벽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좆도 아니라고 말하겠어 그냥 큰 푸른 쓰레기통을 지나치는 시간이라고 말하겠어.


새벽은 관용적으로 희망이나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에 빗대지곤 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새벽이 무어냐고 물으면 시인은 이렇게 대답하겠단다. ‘좆도 아니야. 그냥 큰 푸른 쓰레기통이 지나치는 시간이지.’ 소비가 미덕이 되는 우리 사회의 뒷면에는 거대한 쓰레기통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라 일컬어지는 형광 조끼 입은” 청소부들이 쓰레기통을 후비고 있다. 세기말을 통과하여 새천년을 지나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미 오래 전에 시적 소재나 주제를 특권화하거나 한정하는 유의 주장은 타당성을 잃어버렸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출간 당시 일으켰던 파문이 오늘날 그대로 재현될 순 없을 것이다.?(나는 마침표를 찍고 그 옆에 물음표를 붙여두기로 하다.)1857년 6월 25일에 발매된 『악의 꽃』으로 인해 보들레르는 같은 해 8월 20일 법원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는다. 그 해 초에는 플로베르가 『보봐리 부인』의 출판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 大시인 빅토르 위고는 유죄판결을 받은 보들레르에게 찬사와 격려의 뜻을 전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아름다운 책(악의 꽃)을 받아보았습니다. 예술이란 창공과 같은 것이어서, 무한한 분야입니다. 당신은 최근에 그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의 『악의 꽃』은 별들처럼 빛나고 눈부십니다. (……) 현 사회가 줄 수 있는 아주 진귀한 훈장, 당신은 방금 그것을 받았습니다. 이 사회의 제도가 정의와 윤리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처벌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명예의 관입니다. 시인이여, 악수를 보냅니다.” 추와 악은 전적으로 아이러니와 풍자의 범주에서 규명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우리 존재의 정직성과 깊이에 관련되기도 하고 세계와 타인 고통에 동참하게 만들기도 하며, 또 때로는 미학적인 매혹 속에서 진지하게 탐구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악기는 아직도 어둡고 격렬하다


그대들은 그걸 모른다,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그대 그대들을 나무랐던 만큼 그대들은 나를 다그치고

나는 휘파람을 불며 가까스로 슬픈 노래의 유혹을 이겨내고 있는데


오늘 밤도 그대들은 나에게 할 말이 너무 많고

우리는 함께 그걸 나눠 갖기는 틀렸구나,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불의 악기며 어둠으로부터의 신앙信仰……

그렇다, 나는 혼돈의 음악을 연주하는 대담한 공주르 ㄹ두었나니

고리타분한 백성이여,

기절하라! 단 몇 초만이라도

내가 뭐, 라는 말밖에 나는 할 수 없구나


저기 붉은빛이 방문하고 푸른빛이 주저앉는다.

라는 암시밖에는 할 수가 없구나

―황병승, 「왕은 죽어가다*」(*이오네스코의 희곡 제목)


“불의 악기”가 고리타분한 백성들을 기절시키고 고리타분한 세계에 불을 지르려 한다. “저기 붉은 빛이 방문하고 푸른빛이 주저앉는다, 라는 암시”를 받고서, 성급하게 다그치지 말자. 김수영이 말했듯이, “적들과 함께/적들의 적들과 함께/무한한 연습과 함께”(「아픈 몸이」) 가자.


우리는 미/추, 선/안, 정상/비정상, 주체/타자, 시적인 것/비非시적인 것 등등을 가르는 이분법 자체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이분법적 체계는 언제나 그 어딘가에 어떤 종류의 억압과 폭력을 숨기고 있으니까. 어쨌든 수많은 이분법적 경계가 진동하고 애매해지는 자리에서 혼란과 함께 시적 영역과 존재의 자유가 좀 더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김행숙, 「시적인 것」, 김종훈 외『현대시학』, 서정시학,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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