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언어 언어가 진실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 시대에 거짓말하지 않는 말, 어떤 꾸밈이나 빙 돌려서 말하지 않는 말은 없을까. 소소한 일상을 어떤 꾸밈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며 시가 되지 않을까. ‘나’의 소박한 일상을 친구에게 소소하게 읽어줄 만한 시는 없을까. 낱말의 조작이나 이미지보다는 평범한 문장이나 이야기로 시를 쓸 수는 없을까. 누구나 읽으면 공감하고 말을 쓰면 시가 되는 그런 공감의 시. 시의 언어는 압축되어 있고 비유적이다. 더욱이 그것은 텍스트 내재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압축된 정서적 언어만을 쓰다 보면 시는 소통이 어려워진다. 시만의 독특한 장치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장치가 이미지인데, 이미지image는 원래 허상, 가상, 비현실의 상상을 뜻한다. 수학에서 허수를 뜻하는 i는 이미지의 이니셜에서 가져온 기호이다. 허상만을 말하는 시는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시는 시인들이 전유물이 되고 말 것이다. 더욱이 난해시가 독자 대중을 괴롭히는 말놀이에 불과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서 시에서 소통의 문제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기호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탈구조주의가 등장하면서 시에서 압축이나 내재적인 어법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감이 없지 않다. 탈구조주의의 해체론적 시는 시인들만의 언어에 갇혀 있다. 그들에 의하면 시란 그림이나 음악처럼 순수예술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언어는 그림이나 음악의 매개체와는 다른 점이 있다. 그림의 색이나 선, 면, 혹은 음악의 멜로디나 화음은 의미 자체를 배제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그 매체들은 그 자체가 순수해 의미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자언어는 기본적으로 의미를 매개로 한 소통을 전제로 한다. 즉 소통을 목적으로 생겨난 게 언어이다. 이런 소통을 전제로 만들어진 언어를 최근에 이르러 소통보다는 예술성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시에서 의미를 배제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라캉조차도 기호에서 의미를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기호가 욕망을 지연시킨다고 해서 의미는 완전히 배제되는 것 아니라 확장된다. 기화학적인 문학을 비판하는 켄 윌버 같은 심리학자는 『통합비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해체적인 방법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나아가버렸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데리다는 해체를 주장하다가 너무 나가버린 나머지 사회의 현실성 자체를 없애버리고 난해성을 위한 난해성을 추구한다. 오늘날은 통합의 시대이다. 시를 현실과 통합함으로써 시인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줘야 한다. 20세기 말 프랑스에서 젊은 학생들이 시위할 때 구조주의 물러가라, 라고 외친 것이나 미국 학생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일반 독자를 배제한 학계나 문학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피부에 닿는 정서를 표현했을 때 시는 공감이 이루어진다. 시는 자신이 살던 시대와 소통할 때 건강해진다. 말을 압축하여 내재적인 언어만을 쓴다면 그 시는 시인이라는 외계인 집단의 전유물이 되고 말 것이다. 공감 능력이 떨어진 시대에 시조차 어려운 기호 풀이 방식으로 짜여 있다면 시를 읽는 독자는 사라질 것이다. 여기에 사실성을 담보로 하는 일상적 문장 중심의 시의 역할이 있다. 낱말 중심이 아니라 분장 중심의 말은 낯선 말, 연쇄되고 충돌된 말들 사이를 꿰매주고 이어준다. 시가 일상을 말하듯이 쓴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일상어는 그대로 시가 된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적으면 시가 되고,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감성을 그대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시는 일종의 대화이다. 그러므로 시는 말하듯이 쉽게 쓴다.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말을 시적 정서를 느낄 수 있게 배열하면 시가 된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를 읽어보면 평소에 쓰던 말을 대화하는 방식으로 리듬이 느껴지게 배치했을 뿐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위 시는 평소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로써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각 시행은 단순한 문장이지만 감미로운 정서로 다가온다. 왜일까. 그것은 말을 아꼈기 때문이다. 단순한 진술이지만 그대로 시가 되어 있다. 진은영의 「그 머나먼」이라는 시 일부를 보기로 하자.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의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들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이 시도 소월의 시와 마찬가지로 단순 진술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월의 시와 마찬가지로 말을 아끼면서 각 문장들은 ‘좋다’라는 리듬감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좋다’가 나열된 행간 사이에 있어야 할 산문적 설명이 빠져 있다. 그 대신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라는 말을 넣어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시는 말하듯이, 문장 중심으로 쓴다. 그런데 그 말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있다. 음악에서는 이를 ‘텐션tension’이라고 한다. 기본 화음에 다른 화음을 끼워 넣어 본래의 화음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기법이 텐션이다. 시에서 이와 같이 진술들 사이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또 다른 진술을 넣는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가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 시는 말하듯이 쓴다. 하지만 그 말은 절대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다. 그 사이에는 바짝 독이 오른 코브라의 머리처럼 긴장감이 서린 말이 놓인다. 그 말은 평범한 진술이나 표현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시적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또한 정치시나 목적시도 주로 직설적인 말을 쓴다. 이런 시는 시인이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의 견해를 독자나 청중을 향해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들이 시는 직접적 소통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낭송이나 낭독을 목적으로 하는 시들도 공감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낭송이나 낭독, 노래하는 시들도 현장에 참여한 청중에게 직접적이면서 순간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에는 시적인 의장이나 수식어, 어려운 이미지나 상징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청각은 소리를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두 광화문을 가야할 때입니다 아저씨의 손을 잡고 유모차를 끌고 촛불을 켜야 합니다 시가 소통이 되려면 말의 의미가 단순해야 한다. 즉 말하듯이 써야 한다. 말하듯이 쓰는 시에서는 말과 실제가 일치한다. 그렇다고 말하듯이 쓴 시가 비시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시는 본래 말하듯이 쓴다. 시는 한 개인의 순간적인 체험을 짤막하게 표출하는 양식이다. 이런 시가 점점 에술성이 강화되면서, 새로움이라는 탈을 쓰면서 어려워지고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말하듯이 쓴 시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너무 현란한 장식적 표현이 많은 시들이나 몽롱파 시보다는 단순 진술이나 표현의 시가 훨씬 진솔하고 폐부를 찔러 독자의 공감을 쉽게 불러온다. 말하듯이 쓴 시는 둘러 가지 않고 직접적으로 독자의 가슴으로 돌진하며, 일상의 문장을 쓰기 때문에 담백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 “하늘에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표현들은 그 자체가 우리의 가슴을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는 듯한 임팩트가 있다. 진정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진정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진정성은 시적인 장치나 방법을 뛰어넘는다. 거기에는 생활이 들어 있고, 한 사람의 삶과 한 시대의 정신이 들어 있다. 이런 진술 시에는 일상생활의 깊이와 두께가 있다. 이러한 시는 오랫동안의 성찰과 날카로운 발견에서 비롯한다. 자신이나 사회에 대한 평범하면서 단순하게 뱉는 말은 곧 시가 된다. 또한 말하듯이 쓴 시는 시적 주체와 현실의 인간 사이에 간극이 거의 없다. 시인=사람, 혹은 생활=시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생활 속에서 느낀 바를 그대로 옮겨놓았으므로, 시는 쉽게 구체적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다음 시들에서 시의 주체와 시인 사이의 거리를 확인해 보고, 문장 단위의 시 쓰기에 대해 알아보자. ①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박노해, 「노동의 새벽」 부분 ②가을 산사에서 하룻밤을 지샌다 깊이 잠든 별도 쳐다보고 숲속에서 이는 바람소리도 들으면서 큰스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내 진작 어려서부터 중은 안 되더라도 절을 가까이 하면서 살았더라면 스님의 깊은 언저리라도 배웠을 것을 밤 깊어 스님은 풍경 속으로 잠들고 슬프도록 적막한 고요 속에서 나는 홀로 귀 세운 짐승처럼 어디선가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산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오늘밤은 이 산사에서 귀를 뉘이고 내일은 또 어느 곳에 가서 잠들 것인가를 생각한다 ―이영춘, 「가을 산사에서」 직설적인 진술에는 진솔함이 있다. 더욱이 진술의 시는 한 사람의 체험에서 나온다. 따라서 시는 시적 장치의 단계를 거칠 새도 없이 바로 가슴에서 울려 나온다. 여기에다 진솔함은 시의 주체와 현실의 거리를 최대한 좁힌다. 시의 주체와 시인 사이에 나타나는 거리의 간극이 없어 그만큼 시는 진솔하다. 체험에서 나온 시이기 때문이다. 박노해의 시 ①은 노동자로서의 삶을 자신의 체험으로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인이 노동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독자는 그의 삶으로 바로 끌려 들어간다. 그리고 ②의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인이 직접 체험한 가을 산사에서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라한 시에서는 어떤 시적 장치가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느낌은 누구나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에서는 가을과 산사, 거기에서 오는 감성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자신의 감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자칫 감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감상을 줄이기 위해서 늘어진 수 있는 부분을 끓어내기 위해 종종 서정적 주체를 최소화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어떤 시적인 장치보다 깊은 맛이 나는 울림이 생긴다. 단문의 진술과 진술 사이에 침묵의 공간을 두어 정서적 울림이 크게 하기 위해 감상을 최대한 배제한다. 이를 위해 병치의 배열을 응용하기도 한다. 다음 시에서 직설적인 표현을 어떻게 병치해놓았는지 살펴보자. ①바나나가 거실 식탁에서 뒤척인다 비를 맞고 있는 텔레비전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늙어가는 걸 보면, 뻘쭘히, 이를테면 살그머니, 멘트 속으로 끼어들지 못하는 말들이 화면으로 흘러내린다 나이를 먹는 게 내 직업이에요 냉장고가 사랑받고 싶어 징징거린다. 살며시 여백 같은 말 속으로 어느 날의 시를 쓴 다 레옹의 식물처럼 항상 행복해 하고 질문도 하지 않는, 말들을 뿌리가 없어 좋다. 다른 속도로 가고 싶어요 어스름이 차오르면 곳곳으로, 기억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가로등 불빛이, 으흐흐, 창살을 들락거린다 호퍼의 그림이 있는 달력이 내도록 숫자를 세고 ②돈 빌려줄 수 있어. 아빠, 오늘 밀수 담배 좀 팔었어, 나는 초록 머리를 하고 클럽에 갈 거야. 클랙슨이 빽빽거리네. 덜 떨어진 아빠 애닝니 왔나 봐. 그년에게 제발 자동차 바꾸라고 해. 어젯밤에는 고속도로 한 중간에 서 있는데 150킬로미터로 쌩쌩 달리는 차들이 나를 비켜갔어, 죽음의 천사들은 맹인이야 하지만 꿈은 기계들의 피투성이었어. 커트 코베인의 유서를 대필했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을 만났어, 그 사람은 자기 고양이를 죽인 거야. 펭귄이 변기에 서서 오줌을 누었나 봐. 어제 쓴 일기에서 지린내가 나. 시 ①에서 각 시행들은 직설적 문장을 쓰고 있다. 말하듯이 쓴 시행들이다. 더욱이 2연 4연에서는 하나의 시행이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시행들은 단순한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이를 먹는 게 내 직업이에요”나 “다른 속도로 가소 깊어요”는 일상적 진술과 진술 사이에 끼어서 그 말들을 시적으로 고양시키고 긴장시킨다. 또한 병치는 진술들을 시적인 장치로 엮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사이에는 침묵이라는 긴장감이 있다. 그리고 ②의 시는 진술과 대화로 엮여 있다. 각 연들은 병치되어 있다. 그리고 병치된 시의 연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흐른다. ―전기철, 『언어적 상상력으로 쓰는 시 창작의 실제』, 푸른사상, 2020. |
2021.05.27 00:36
공감의 언어 / 전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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