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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17:12

발을 씻으며/황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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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씻으며/황규관


 사람이 만든다는 제법 엄숙한 길을
언제부턴가 깊이 불신하게 되었다
흐르는 물에 후끈거리는 발을 씻으며
엄지발톱에 낀 양말의 보풀까지 떼어내며
이 고단한 발이 길이었고
이렇게 발을 씻는 순간에 지워지는 것도
또한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때로는 종달새 울음 같은 사랑을 위해
언젠가는 가슴에서 들끓는 대지를
험한 세상에 부려놓으려 길이,
되었다가 미처 그것을 놓지 못한 발
그러니까 씻겨내려가는 건 먼지나 땀이 아니라
세상에 여태 남겨진 나의 흔적들이다
지상에서 가장 큰 경외가
당신의 발을 씻겨주는 일이라는 건
두 발이 저지른 길을 대신 지워주는 의례여서 그렇다
사람이 만든 길을 지우지 못해
풀꽃도 짐승의 숨결도 사라져가고 있는데
산모퉁이도 으깨어져 신음하고 있는데
오늘도 오래 걸었으니 발을 씻자
흐르는 물이 길을, 씻자


 <시 읽기> 발을 씻으며/황규관

벌써 8월입니다. 올해도 벌써 일곱 달이 지나가고 여덟 번째의 달을 맞이했습니다. 일곱 달을 걸었던 것입니다. 참 많이도 걸었습니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몸뚱어리를 이끌고.

언제부터인가 발을 꼼꼼하게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발뒤꿈치의 각질도 성의껏 깎아냅니다. 바셀린도 꼼꼼히 발라줍니다. 저녁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발전용 물비누로 발을 닦아 줍니다. 깨끗한 물로 정성스럽게 씻습니다. 그래도 잠을 자려면 통증으로 파스를 몇 개 붙여야 합니다. 파스를 붙이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허리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허리디스크로 신경이 눌려서 발아 아픈 까닭일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비만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무거운 몸을 가녀린 발목과 발이 견뎌야 하니, 더군다나 46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으니 탈 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젊을 때 몸을 관리하지 않으면 나이 들어서 골병 든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관리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몸을 대하는 현상 중 하나는, 눈에 가까울수록 더 많은 관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대표적입니다. 그 까닭은 아마도 눈은 눈을 가장 먼저 보게 되고, 눈이 얼굴의 부분이므로 자연스럽게 눈과 얼굴을 하나로 간주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을 훑어볼 때도 위에서 아래로 보게 되는데 그 까닭도 눈 때문(특히 눈의 위치)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발은 어떻습니까. 상체도 아닌 하체의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합니다. 웬만하면 바라보지 않는 곳입니다.

또한 우리의 사상, 철학, 관념 등이 ‘눈’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역사가 바로 ‘시각’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오감'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시각을 손꼽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발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각의 입장에서 아름다운 것 보기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아름답지 못한 것은 악한 것입니다. 발은 인간의 신체에서 아름답지 않습니다. 시각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후각(동물적인 감각)이었는데, 발은 후각의 관점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합니다.
예수가 제자의 발을 씻긴 것을 기려, ‘세족식’의식을 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발을 씻기는 이유는 발이 사람의 가장 더럽고 낮은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발은 우리에게 부족하고, 연약한, 감추고 싶은 신체의 일부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발이 없다면, 난처함을 초월할 정도로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발이 없다면 우리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 보행능력을 잃는다는 의미가, 단순히 불편하다는 것이 전부입니까. 인간이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 노동으로, 이때 발은 노동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관이 됩니다.

발은 노동의 상징이었습니다. 고흐의 유명한 그림인 ‘구두’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발입니다. 저 낡은 구두를 신고 질척한 밭과 길을 걸어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황금의 수확을 했을 것입니다. 발이 있어 생을 일구고,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저 발. 저 묵묵함을, 비록 목소리로에 불과하지만(아직도 우리는 노동을 경시합니다) 이제야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느 누가 발이 되기를 원하겠습니까. 필요하지만, 누구도 원치 않는 저 발의 역할. 그러므로 발은 더 찬양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천대하면서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기 싫어하고 기피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발입니다.


[출처] 황규관 시인의 시 '발을 씻으며'|작성자 주영헌 


 ** 박수호 시창작에서 모셔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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