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손택수
사내가 수레를 끌고 언덕바지를 오른다. 사내의 비틀린 몸은 땀방울을 쥐어짜고 있다
수박이 실린 수레 뒤에서 배가 불록해진 여자가 끄응끙 수레를 따른다 한쪽 손으로는 무거운 배를 안고 한쪽 손으로는 수레를 밀면서
지난 봄 사내의 넝쿨 끝엔 딸기와 외가 열렸었다 상하기 시작한 딸기를 자주 헐값에 팔아넘겨야 했었다
소아마비 뒤틀리는 사내의 몸속 굽이치는 무늬가 길을 휘감고 오른다 만삭이 된 수박 수레바퀴를 돌린다
저 고행 끝에 가을이면 꼬투리가 터지리라 단단한 꼬투리 뒤틀어지는 힘으로 씨앗들이 톡 톡 터져 나오리라
머리가 짓눌린 때마다 볼펜을 똑딱거리며 바라보는 사무실 창밖 배배 튼 길이 꼭 볼펜 속 스프링 같다 꾸욱 짓눌리는 힘으로 따악 소리를 내며 튕겨오르는 스프링,
날아갈 수 없는 허리와 목을 비틀며 기지개를 켠다 언덕 위의 꼬부라진 골목길 넝쿨넝쿨 뻗어간 몸에 맺힌 만삭 한 덩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시 읽기> 스프링/손택수
해마다 거르지 않고 봄꽃에 마음껏 유혹당했지만, 올해도 다시 실컷 유혹당하고 싶다. 한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싶다. 꽃에게 내 마음 다 털리고 또 빈털터리가 되고 싶다. 은은한 파스텔 톤이 점점 짙어지면서 매일매일 바뀌어가는 다양하고 화려한 색깔의 마술 때문일 것이다. 그 색깔 속에 숨어 있는 무섭도록 천진스러운 힘 때문 일 것이다. 짧은 기간에 제가 가지고 있는 힘을 남김없이 다 터뜨리고 가는 뒤끝 없는 자유 때문일 것이다. 봄꽃의 매력에는 ‘통쾌함’도 있다. 흑백의 풍경을 일시에 천연색 천지로 바꾸어 놓는 통쾌함, 추위의 폭력을 일순간에 부드러운 향기로 바꾸어놓는 통쾌함. 그 통쾌함의 진정한 정체는 꽃 속에 들어 있는 ‘탄력’이다. 그 탄력은 겨우내 추위가 쥐어짜는 힘을 견디려고 몸을 최대한 응축시켰다가 마침내 한껏 기지개를 켜면서 온몸을 쭉 펼 때 튕겨 오르는 힘이다.
벌판 한 군데 눈이 꿈틀거리더니/새가 움터 날아오른다./그 자리가 뻥 뚫린다.(황인숙, 「봄」 부분)
그 통쾌함은 서서히 오지 않고 ‘날아오름’과 ‘뻥 뚫림’처럼 갑자기 온다. 땅 속에 온갖 동식물들의 피와 더듬이와 후각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폭발하듯이 온다. 봄이 갑작스럽게 오는 것은 겨우내 숨어 있던 생명체 속에서 터질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황지우,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부분)
벚꽃이 개화하는 힘은 뜨거운 진공의 압력 속에 있다가 그 압력이 풀리는 순간 폭발하듯 튀겨진 ‘튀밥’의 폭발력에 뒤지지 않는 것 같다.
꽃의 탄력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겨울 추위의 폭력과 그것을 견디려고 온몸을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던 상처가 감추어져 있다. 그 상처의 흔적인 나이테는 “꽃과 잎으로 자유로이 드나들며 숨쉬던/모든 틈과 통로가/일제히 딱딱하게 오므리고/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이며, “두꺼운 겁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거칠게 갈라졌던 자리”다. 바로 그 자리에서
뿌리가 빨아들인 맑은 자양들은/물관 속에서 호흡과 움직임을 멈추고/나무 밖의 거대한 힘에 귀 기울였으리라/추위의 난폭한 힘은 기어코 껍질을 뚫고 들어가/수액 깊이 스며들었으리라/수액을 찾아 들어왔던 햇빛과 공기들은/그 자리에서 겨우내 얼었다가/독한 향기와 푸르고 진한 빛으로 익어갔으리라(졸시, 「나무」 부분)
제 몸보다 크고 무거운 수레를 끌려면, 제 몸무게보다 훨씬 큰 삶의 짐을 감당하려면, 「스프링」의 부부처럼 반동의 탄력을 위해 먼저 제 몸을 움츠려야 한다. 수레 끄는 사내와 미는 여자가 비틀려 흉한 모습이 된 이유는 제 안의 반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몸을 한껏 웅크렸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몹시 힘들고 위축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프링이 한껏 움츠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능하거나 보잘 것 없는 것 같이 보인다면 그것은 제 안의 꽃이 터질 순간의 환희를 기다리는 스프링이 최대한 움츠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기택, 『다시, 시로 숨쉬고 싶은 그대에게』, 다산책방,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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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몹시 힘들고 위축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프링이 한껏 움츠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능하거나 보잘 것 없는 것 같이 보인다면
그것은 제 안의 꽃이 터질 순간의 환희를 기다리는 스프링이 최대한 움츠리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멋진 표현이네요. 스프링이 움츠리고 있는 이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