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벌레가 더 신성하다 지금 이 순간 안식일의 종소리가 저 멀리 골짜기에서 부서지고 있다. 종소리는 경탄을 자아낼 만큼 겸손하고 따뜻하다. 세상 곳곳에 퍼지는 이런 위선의 메아리는 교리문답이나 종교서적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무스케타퀴드 강의 종다리와 딱새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나는 귀뚜라미가 아침이 온 줄도 모르고 아직 깊은 밤이기나 한 듯 조용한 희망으로 울어대는 이른 새벽이 좋다. 이때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이슬에 젖어 신선하다. 귀뚜라미가 부르는 대지의 노래! 이는 기독교가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다. 삶이 부르는 마지막 노래를 듣는 기분으로 자연의 소리에 경건히 귀 기울이라. 콩코드에는 노트르담교회가 필요치 않다. 우리의 숲이 훨씬 더 웅대하고 신성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안식일에 교회 종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지고 있다. 놀라울 정도로 겸손하고 따뜻하게 들린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위선’이라고 비판한다. 교리문답이나 종교서적에 비견하면서 말이다. 소로는 종교적 위선에 있어 가장 먼저 교리문답을 꼽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종교가 이런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교리문답은 종교에 처음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신분증명서와 같은 세례증서를 수여할 때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위선의 전형처럼 되었을까? 실제로 교리문답의 내용을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겉보기에는 물음과 대답으로 되어 있어서 ‘문답’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대답에 해당하는 교리를 소개할 목적으로 물음을 짜맞춘 형태다. 말하자면 대답이 먼저 있고 그 대답에 물음이 따라온 것이다. 우리 삶은 대답을 구하기 어려운 물음들로 넘실거리는데 교리문답은 대답부터 먼저 등장한다. 대답을 모시기 위해서 물음을 앞세워 놓으니 그 물음이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위선이라는 것이다. 종교서적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백하고 설파하지만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할 목적으로 지어진 말이다. 듣기에는 그럴 듯하고 온갖 좋은 미사여구들이 동원되지만 이 역시 우리네 현실과는 따로 노는 이야기들로 범람하니 위선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교회의 종소리는, 더욱이 안식일을 알리는 종소리는 평화롭게 쉼을 주는 것 이어야 할 터인데 현실의 교회 종소리는 요란하다. 교회로 빨리 달려오라는 자명종 같이 들린다. 종교가 우리에게 쉼을 주기보다는 더 바쁘게 만드는 것 같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 의례나 행사에 규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물론, 무언가 부지런하게 활동하고 봉사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독실한 신앙’이라고 부르면서 부추긴다. 그러니 종교에서 그야말로 ‘안식’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종교가 이를 잊어버린 듯하다. 아니 사실 우리 인간들이 이를 잊어버렸다. 남 탓할 것도 없이 우리가 그렇다. 우리 책임이다. 차라리 이른 바 새벽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아직도 밤중인 듯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 뿜어내는 듯한 대지의 소리가 참된 ‘안식의 종소리’라 소로는 말한다. 인간에게 언제든 쉴 곳을 제공하는 숲이 더 웅대하고 신성한 교회라는 것이다. 삶이 힘들고 어려워서 쉴 곳을 찾는 영혼에게 위선을 불사하면서 교리를 강박적으로 학습시키지 않고 참된 쉼을 주기 때문이겠다. 이제 시끄러운 종교가 나직하고 넉넉한 자연에게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재현, 『인생의 마지막 질문』, 「무엇이 먼저인가」, 청림출판사, 2020. ** 박수호 시 창작에서 퍼온 글 ** |
2023.01.11 03:45
자연의 벌레가 더 신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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