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사람도 동사다
삶도, 사람도 동사다 선禪에서 견성見性이라는 말을 ‘본성을 본다’는 뜻 대신, ‘보는 것이 본성이다’라는 뜻으로 새겨요. 시 또한 주어와 술어, 주체와 대상의 자리바꿈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 시는 자기 삶을 살아내고, 자기 죽음을 죽으려는 의지예요. 달리 말해 ‘살다’, ‘죽다’라는 자동사를 타동사로 바꾸려는 의지예요. ―이성복, 《무한화서》 시詩는 어떻게 쓰이는가? 산문과 비교해보면 특성을 살필 수 있다. 산문은 쓰는 사람의 말하고자 하는 바가 쓰여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나’를 주장하고 내세우고 호소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나’를 말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말하고 쓰고 많은 산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산문에서 주어는 당연히 ‘나’다. 그런 내가 때로는 너이기도 하고 그/그녀이기도 하지만 인칭만 바뀌었을 뿐 실재 내용은 모두 ‘나’를 주어로 하는 것이다. 주체로서의 ‘나’가 늘어놓는 소리다. 그런데 시는 다르다. 말하기보다는 듣는 데서 시가 나온다. 말하는 소리라기보다는 듣는 소리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봐야 할 것이 소리로 창법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득음 得音이다. 득음은 ‘소리를 얻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무수히 갈고 닦음으로써 소리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이다. ‘소리는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얻게 된 소리로 애절하고 비통한 원망의 소리도 내고 환희의 지경을 노래하기도 한다. 일상적 어조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노래가 ‘득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창唱이 소리를 얻어서 하는 것이라면 시詩는 소리를 들어서 하는 것이다. 산문이 내가 내는 소리라면 그러니 들을 수 있어야 시를 쓸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 산문과 비교하니 주체와 대상이 서로 뒤바뀐다. 산문에서는 내가 주체이지만 시에서 ‘나’는 소리가 전해진 대상이다. ‘나’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나’를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분법을 파괴하는 일이다. 그런데 문법을 파괴함으로써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삶에서는 ‘나’가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산문의 문법이 앎의 논리라면, 시의 어법은 삶의 생리다. 그러기에 삶이 우리에게 속삭이기도 하고 내지르기도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들어야 시가 나온다. 나아가 시에서는 주어와 술어도 자리바꿈한다. 이건 주체와 대상이 바뀌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이다. 명사들 사이의 자리바꿈이 아니다. 명사와 동사가 서로 자리를 바꾼다. 명사가 앞서 나오고 동사가 붙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경우 주도권은 명사에 있게 되고 우리는 모든 것을 명사화해서 보게 된다. 정형화하고 고정적으로 새겨낸다는 말이다. 이런 문법은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안정을 보장해줄 것 같고 또한 편리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정형화로 인해 삶의 역동성이 손상된다. 변화가능성을 집어버리고 결국 잃어버린다. 삶의 현실에서 동떨어진 언어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동사가 주도권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삶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람이나 삶이나 모두 ‘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파생적 명사다. 문법적으로 기능하려다 보니 명사가 된 것일 뿐 본래의 뜻은 에누리 없는 동사다. 이를 회복하라는 삶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시가 나온다. 그러니 살고 죽는 것이 자동사가 아니라 타동사다. 어찌 시만 그러할까? 삶이 이미 그러하다. ‘산다’는 것이 타동사다. 자동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정재현, 『인생의 마지막 질문』, 「무엇이 먼저인가」, 청림출판사, 2020. |
*박수호 시 창작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