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김옥순 시인 홈페이지

좋은 글

2023.05.29 02:18

부엌-상자들/이경림

조회 수 3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부엌-상자들/이경림

그때 그녀는 거기 머무르는 허공들처럼 아주 조용한 환자였다매일 반복되는 한 가지 일만 빼고는
일은 대개 새벽녘에 터졌다 내가 잠든 틈을 타 그녀는 조용히 공격해 왔다
그녀는 소리없이 산소 호스를 뽑고 침대를 내려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쪽으로 갔다인기척에 놀란 내가 억지로 그녀를 데려와 다시 침대에 뉘며 물었다.
엄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어딜 가긴부엌에 가지빨리 밥을 지어야지
아이구 엄마두 여긴 병원이에요 부엌은 없어요!
무슨 소리냐 부엌이 없다니 그럼 넌 뭘로 도시락을 싸가고 너희 아버진 어떻게 아침을 드시니?
엄만 지금 아파요 이젠 밥 따윈 안 해도 된다구요!
큰일날 소리아버지 깨시기 전에 서둘러야지
엄마여긴 병원이라구요 부엌은 없어요!
얘야 세상에부엌이 없는 곳이 어디 있니어디나 부엌은 있지 저기 보렴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비스듬히 열렸잖니!
저긴 부엌이 아니에요 복도예요
그래언제 부엌이 복도가 되었단 말이냐밥하던 여자들은 다 어딜 가구?
밖으로 나갔어요엄마밥 따윈 이제 아무도 안 해요 보세요저기 줄줄이 걸어나가는 여자들을요
깔깔깔(그녀는 정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배를 움켜 쥐고 웃었다)
얘야정말 어리석구나 저 복도를 지나 저 회색 문을 열고 나가면 더 큰 부엌이 있단다 저기 봐라 엄청나게 큰 밥솥을 걸고 여자들이 밥하는 것이 보이잖니된장 끓이는 냄새가 천지에 가득하구나
엄마 제발 정신 차리세요 여긴 병원이란 말예요
계집애가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 게 아니란다아버지 화나시겠다 어여 밥하러 가자 아이구 얘야숨이 이렇게 차서 어떻게 밥을 하니?(모기만한 소리로누가 부엌으로 가는 길에 저렇게 긴 복도를 만들었을까세상에별일도 다 있지 무슨 여자들이 저렇게 오래 걸어 부엌으로 갈까?

엄마는 입술이 점점 파래지더니 까무러쳐서 오래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그녀가 기어이 그 긴 복도를 걸어 나가 엄청나게 큰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엄마의 청국장 냄새가 중환자실에 가득했다.



<시 읽기1> 부엌-상자들/이경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는 엄마라는 이름을 헤아릴 나이가 된 딸이 엄마에게 부엌이 좋으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엄마는 이 물음을 알아듣지 못한다엄마가 식구에게 밥해 먹이는 일이 좋아서 하거나 싫으면 안 해도 되는 선택이 될 수 있을까엄마는 그런 물음을 한 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내키면 밥을 하고 싫으면 밥을 안 해도 되는 선택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좋고 싫고를 생각하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좋으면 태어나고 싫으면 안 태어날 수 없듯이좋으면 숨 쉬고 싫으면 숨을 안쉴 수 없듯이좋으면 죽고 싫으면 안 죽을 수 없듯이먹는 일도 좋고 나쁨의 선택을 떠나 있다인간에게 입이 있고 위장이 있는 한어머니에게 식구가 있고 자식이 있는 한그것은 결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선택이 될 수 없다그 밥의 준엄한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곳이 부엌이요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어머니라는 이 땅의 오랜 관습도 그런 선택을 떠나 있다.
오후 여섯 시마요네즈 군대가 쳐들어 온다/토마토 군대가 쳐들어온다/그 끔찍한 남편과 아이들이 쳐들어온다”(접시라는 이름의 여자)고 송찬호 시인도 밥 차리는 전쟁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다일생 동안 밥을 해대도 그치지 않고 쳐들어오는 밥때그 적과 싸워 어떻게 이기겠는가어떻게 밥과 싸워서 밥을 안 해도 되고 밥을 안 먹어도 되는 세상을 이루겠는가밥을 안 먹어도 되는 입을 어떻게 만들겠는가먹어도 먹어도 결코 채워지는 법이 없는 위장을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는가그 싸움은 백전백패다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싸움이다밥하기는 끝나지 않는 책임과 의무요어머니는 그 일에서 결코 퇴직할 수 없는 직업이다.

위 시에서도 병원에 입원하여 밥할 일이 없어졌는데도 새벽에 몰래 부엌을 찾는 어머니는 부엌도 없는데 어딜 가느냐는 딸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부엌이 없는 세상이라니식구들에게 밥을 해 먹이지 않는 어머니라니어머니에게는 병원이든 거리든 도시 한복판이든 다 부엌이 된다부엌이 되어야만 한다세상은 엄청나게 큰 부엌일 뿐이다인간이 밥을 먹고 살아가는 한 밥이 법이기 때문이다밥은 국법이다”(이성복밥에 대하여)

저 복도를 지나 저 회색 문을 열고 나가면 더 큰 부엌이정말 큰 부엌이 있단다 저기 봐라 엄청나게 큰 밥솥을 걸고 여자들이 밥하는 것이 보이잖니?” 밥 고행부엌 고행어머니 고행을 얼마나 해야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눈앞에 닥친 죽음보다도 딸의 도시락과 아버지의 밥상이 더 걱정되는 경지밥걱정의 힘이 병실이며 복도며 문밖의 모든 세상을 다 부엌으로 바꾸어버리는 경지세상 한 복판에 걸린 큰 밥솥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은아침마다 전철과 버스와 도로는 출근 전쟁이다세상은 큰 밥그릇 싸움터다그러니 어서 부엌으로 가 밥을 해야지 병원에 누워있거나 죽을 틈이 어디 있겠는가온 세상이 엄청나게 큰 부엌으로 변형되도록 한평생 밥을 해대더니드디어 어머니에게 밥은 종교가 되고 신이 된 것이다부엌은 신전이 되고 밥하기는 예배가 된 것이다.

밥에 갇힌 어머니부엌에 갇힌 어머니어머니에 갇힌 어머니어떻게 어머니를 이 감옥에서 구해낼 것인가평생 어머니를 가두고 부려 먹고 억누르던 밥이 이제는 어머니의 유일한 삶의 이유가 되었다밥하는 일을 중단하는 순간 어머니는 갑자기 늙고 병들고 죽고 말 것이다이제 밥 고행은 감옥이 아니라 구원이 된 것일까딸이라고 해서 죽을병이라고 해서 어떻게 그 거룩한 고행의 즐거움을 어머니에게서 빼앗을 수 있겠는가어머니이기도 한 이경림 시인은 마지막까지 밥을 하려다 순교한 어머니 앞에서 망연자실한다밥의 역설 어머니의 역설 앞에서 말을 잃는다.

김기택다시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다산북스, 2016.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부엌-상자들/이경림 들국화 2023.05.29 37
147 삶도, 사람도 동사다 / 이성복 (무한화서) 들국화 2023.02.21 104
146 프로출근러 / 이재훈 시 프로출근러 / 이재훈 시 출근을 한다는 건 가장의 무게를 다시 짊어지는 것 퇴근을 한다는 건 가장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 것 부천에서 구로 구로에서 병점 24개... 1 들국화 2023.01.31 109
145 식탁의 농담 / 박상조 1 들국화 2023.01.27 113
144 긍정적인 밥/함민복 긍정적인 밥/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해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 들국화 2023.01.22 105
143 길갓집 / 김옥순 길갓집 / 김옥순 11월의 정류장 121쪽 들국화 2023.01.11 24
142 자연의 벌레가 더 신성하다 들국화 2023.01.11 59
141 날씨 흐려도 꽃은 웃는다 / 김옥순 1집 속이 비어서일까? 속이 차서일까? 들국화 2023.01.07 55
140 묵화 / 김옥순 디카시 1 들국화 2022.12.01 58
139 똥꽃 / 이진수 1 들국화 2022.11.17 68
138 쉬 / 문인수 들국화 2022.11.15 119
137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이성복 들국화 2022.10.01 43
136 스프링 / 손택수 1 들국화 2022.08.24 132
135 나는 종종 낮을 잊어버린다 나는 종종 낮을 잊어버린다 / 김옥순 다리를 건들건들 껌을 질겅질겅 씹고 허락없이 남의 담을 넘는 도둑처럼 이방 저방 카페 블로그 방을 쏘다니며 밤을 허비하... 들국화 2022.07.24 35
134 좋은 시란? /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들국화 2022.06.28 188
133 소들어오던 날 / 박상조 1 들국화 2022.06.20 57
132 나에게 묻는다 / 이산아 들국화 2022.04.11 93
131 현충일 오후 / 김옥순 시 현충일 오후 산에 올랐다 *해발 167 m* 부천 정착 40년 걸음마 후 처음 걸어선 단 한 번의 꿈도 내겐 사치였던 산 정상을 휘청이는 무릎을 붙잡아 쓸어질 듯 앉... 들국화 2022.04.10 29
130 짬 / 박상조 詩 1 들국화 2022.03.24 91
129 별 헤는 밤 / 윤동주 詩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들국화 2022.03.24 57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Next
/ 9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