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냄새/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 보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
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 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 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느냐는 듯이
바람이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이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 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
<시 읽기> 바람의 냄새/윤의섭
매년 오는 가을의 첫날을 나는 냄새로 느낀다. 가을은 확연히 피부로 느낄 만큼 선선한 날씨로 오지만, 네게는 자주 냄새로 온다. 그 냄새는 이른 아침에 물을 열고 집을 나서는 순간에 갑자기 다가온다.
가을 냄새는 차고 비리다. 여름에도 비린내가 있지만 가을의 비린내는 다르다. 그 비린내는 이제 막 숨 막히는 더위에서 풀려난 푸나무들이 뿜어내는 몸기운의 냄새이며, 최대치의 성장을 멈춘 생명체들이 성장의 숨가쁨에서 벗어나 여유롭게 내쉬는 호흡의 냄새다. 축축하고 텁텁한 여름 비린내와 달리 잘 마른 가벼운 냄새다. 더운 날씨에 녹아 멈춰버린 공기, 더위에 막혀 활기가 둔화된 공기, 고체의 질감을 가진 공기 덩어리의 냄새가 아니라, 가볍고 날렵하게 흐르는 냄새다. 노동이 막 끝나자마자 오는 구수한 휴식의 냄새다. 충분히 익은 비린내가 향기로 막 변화하려는 과정의 변곡점에 있는 냄새다. 더위에 축 늘어진 냄새가 아니라 찬물을 먹고 정신이 번쩍들어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냄새다. 앞으로만 달리다가 잠깐 멈추어 옆을 돌아보고 뒤를 돌아보는 냄새다. 속도를 늦추어 제가 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는 냄새다.
나는 그 냄새에서 겨울의 예감을 읽는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늙음이라는 시간의 병을 후각과 청각으로 감지하는 예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을 차가운 공기로 들이마시는 예감, 더위에 지쳐 혼란해진 몸이 깨어나자마자 갑자기 스스로를 투시하는 예감, 피와 살 속에서 활동하는 본능이 꺼내질 듯 만져지는 예감을 읽는다.
침묵도 소리의 일종이듯이 잘 들리지 않는 무수한 작은 소리들로 되어 있는 특별한 소리이듯이, 모든 유기체와 세상의 기운이 제각기 자기 소리를 지니면서도 하나의 소리 속에 녹아서 커다란 고요가 되는 소리이듯이, 가을 냄새는 수많은 삶들이 녹아서 하나가 된 냄새의 하모니이며, 하나 속에 전부가 들어 있고 전부 속에 하나 하나가 독립적으로 들어 있는 향기의 하모니다. 이 통째! 한 줄기 바람 속에 들어 있는 이 통째! 매일 다람쥐 쳇바퀴를 돌리는 무감각한 관습을 한 방 후려치는 이 통째! 순식간에 모든 핏줄과 신경과 뉴런으로 퍼져 온몸을 깨어나게 하는 이 통째! 내 살과 세상과 우주를 하나의 후각으로 명쾌하게 요약시키는 이 통째!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때 누가 있었는지 냄새로 알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냄새로 지나간 시간을 찾아내거나 존재의 근원에 닿을 수도 있을까? 「바람의 냄새」는 그런 믿음에서 나온 시인 것 같다. 바람 소고에 남아 있는 냄새로 한때 이 땅을 살다 간 수많은 삶과 죽음의 비밀을 엿보려 한다. 그 호기심은 이 세상 구석구석에 코를 들이대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이 웃음소리”처럼 시간의 기억을 넘기도 하고,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처럼 공간의 기억을 넘기도 한다. 그 후각은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과 같이 우주적이며, 그 욕망은 모든 삶이 시작된 “발원지”를 찾아내려는 데까지 뻗어 있다. 이 코의 상상력은 수천 년 수만 년 이 땅을 살다 간 선조들의 후각적인 기억과고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코의 사유는 어디까지 닿아 있을까.
** 박수호 시창작에서 모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