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에서/오태환 어느 손手이 와서 선사시대 고분 안에 부장附葬된 깨진 진흙항아리나 청동세발솥의 표면에 새겨진 글씨들을 닦아 내듯이 가만가만 흙먼지를 털고 금속때를 훔쳐 글씨들을 맑게 닦아내듯이 누가 내 오래 된 죽음 안에 새겨진 글씨들을 맑게 닦아내 줬으면 좋겠다. 내 몸이 쓴 글씨들을 맑게 닦아내 줬으면 좋겠다. 내 몸이 쓴 글씨들을 육탈시켜 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저 별빛들처럼 맑게 육탈된 글씨들인 채로 내 몸이, 더 죽고 싶다 사랑이여 <시 읽기> 고분에서/오태환 시는 개인의 순정을 알몸인 채로 품을지언정 별것 아닌 내용을 지리멸렬 이어가지 않는다. 직관적 성격이 강한 데다 운율감과 압축의 미학을 돋을볕처럼 붓 끝에 벼렸으므로 시는, 시의 촉수에 포획된 한 개의 상황에 집중할 뿐이다. 자신의 몸을 고분 속 부장품과 동일시하다니, 시간의 가치가 소멸되었을 고분 “진흙항아리나 청동세발솥의 표면에 새겨진 글씨를 닦아 내듯이” 어느 손이 찾아와 자신의 몸속 “오래 된 죽음 안에 새겨진 글씨”를 닦아내 달라니. 몸이 쓴 글씨들을 섣불리 해독하지 말고 육탈시켜 달라는, 별빛들처럼 맑게 염습해 달라는 목소리는 맑다. 문명의 티가 감히 범접할 수 없다. 어디까지 살아 봤고 어디까지 죽어 봤기에, 부조리한 세상이 시인에게 무엇을 요구했기에 자신의 몸속을 오래된 죽음처럼 바라볼 수 있을까. 세간의 잣대와 저울의 눈금이 닿지 않는 데서 반짝이는 시의 영토가 새삼스럽다. 죽고 싶어서 시를 쓰지는 않는다. 되레 “죽고 싶다”는 욕망에 기대어 화자는 강렬하게 살고 싶은 시를 쓴다. 흙먼지며 금속 때를 헝겊으로 닦듯 살고 싶은 욕망을 ‘육탈’이며 ‘염습’에 응결시킨 죽음의 이미지는 시간의 바깥에서 새어나온 날빛처럼 살갑다. 목숨의 정혈에 집중된 시의 상상력은 사회 역사적 상상력을 웃돈다. 수도 없이 죽어 봤고 오래 죽어 봤을 그래서 더 살고 싶을 현재가 “맑게 육탈된 글씨인 채로” 산문율에 친친 감긴다. 일천한 글줄이 못 닿는 소외의 그늘 속에서 자기 그리움의 한계를 몸으로 삐뚤빼뚤 쓰고 지우고 또 써내려갈 시여. 사랑이여. ―이병초,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 형설, 2021. |
2023.10.23 21:23
고분에서, 오태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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