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김옥순 시인 홈페이지

좋은 글

2023.10.23 21:23

고분에서, 오태환 시

조회 수 3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분에서/오태환


어느 손이 와서 선사시대 고분 안에 부장附葬된 깨진 진흙항아리나 청동세발솥의 표면에 새겨진 글씨들을 닦아 내듯이 가만가만 흙먼지를 털고 금속때를 훔쳐 글씨들을 맑게 닦아내듯이 누가 내 오래 된 죽음 안에 새겨진 글씨들을 맑게 닦아내 줬으면 좋겠다내 몸이 쓴 글씨들을 맑게 닦아내 줬으면 좋겠다내 몸이 쓴 글씨들을 육탈시켜 줬으면 좋겠다그래서 저 별빛들처럼 맑게 육탈된 글씨들인 채로 내 몸이더 죽고 싶다 사랑이여



<
시 읽기고분에서/오태환

시는 개인의 순정을 알몸인 채로 품을지언정 별것 아닌 내용을 지리멸렬 이어가지 않는다직관적 성격이 강한 데다 운율감과 압축의 미학을 돋을볕처럼 붓 끝에 벼렸으므로 시는시의 촉수에 포획된 한 개의 상황에 집중할 뿐이다.

자신의 몸을 고분 속 부장품과 동일시하다니시간의 가치가 소멸되었을 고분 진흙항아리나 청동세발솥의 표면에 새겨진 글씨를 닦아 내듯이” 어느 손이 찾아와 자신의 몸속 오래 된 죽음 안에 새겨진 글씨를 닦아내 달라니.

몸이 쓴 글씨들을 섣불리 해독하지 말고 육탈시켜 달라는별빛들처럼 맑게 염습해 달라는 목소리는 맑다문명의 티가 감히 범접할 수 없다어디까지 살아 봤고 어디까지 죽어 봤기에부조리한 세상이 시인에게 무엇을 요구했기에 자신의 몸속을 오래된 죽음처럼 바라볼 수 있을까세간의 잣대와 저울의 눈금이 닿지 않는 데서 반짝이는 시의 영토가 새삼스럽다.

죽고 싶어서 시를 쓰지는 않는다되레 죽고 싶다는 욕망에 기대어 화자는 강렬하게 살고 싶은 시를 쓴다흙먼지며 금속 때를 헝겊으로 닦듯 살고 싶은 욕망을 육탈이며 염습에 응결시킨 죽음의 이미지는 시간의 바깥에서 새어나온 날빛처럼 살갑다.

목숨의 정혈에 집중된 시의 상상력은 사회 역사적 상상력을 웃돈다수도 없이 죽어 봤고 오래 죽어 봤을 그래서 더 살고 싶을 현재가 맑게 육탈된 글씨인 채로” 산문율에 친친 감긴다일천한 글줄이 못 닿는 소외의 그늘 속에서 자기 그리움의 한계를 몸으로 삐뚤빼뚤 쓰고 지우고 또 써내려갈 시여사랑이여.
―이병초,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 형설, 2021.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8 날씨 흐려도 꽃은 웃는다 / 김옥순 1집 속이 비어서일까? 속이 차서일까? 들국화 2023.01.07 55
27 자연의 벌레가 더 신성하다 들국화 2023.01.11 59
26 길갓집 / 김옥순 길갓집 / 김옥순 11월의 정류장 121쪽 들국화 2023.01.11 24
25 긍정적인 밥/함민복 긍정적인 밥/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해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 들국화 2023.01.22 105
24 식탁의 농담 / 박상조 1 들국화 2023.01.27 113
23 프로출근러 / 이재훈 시 프로출근러 / 이재훈 시 출근을 한다는 건 가장의 무게를 다시 짊어지는 것 퇴근을 한다는 건 가장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 것 부천에서 구로 구로에서 병점 24개... 1 들국화 2023.01.31 109
22 삶도, 사람도 동사다 / 이성복 (무한화서) 들국화 2023.02.21 104
21 부엌-상자들/이경림 들국화 2023.05.29 37
20 바람의 냄새/윤의섭 시와해설 들국화 2023.06.21 56
19 도굴 / 박상조 詩 도굴 / 박상조 詩 모두가 잠든 새벽 엄마는 뒷산 주인집에서 묻어 놓은 병든 돼지 새끼를 몰래 파냈다 그리곤, 몇 시간을 그렇게 콩알만 한 심장으로 칠흑 같은 ... 1 들국화 2023.07.19 72
18 퀵서비스/장경린 들국화 2023.09.14 28
» 고분에서, 오태환 시 고분에서/오태환 어느 손手이 와서 선사시대 고분 안에 부장附葬된 깨진 진흙항아리나 청동세발솥의 표면에 새겨진 글씨들을 닦아 내듯이 가만가만 흙먼지를 털고... 들국화 2023.10.23 32
16 별 멍청이네 집 / 김남권시 1 들국화 2023.11.25 68
15 미소 / 구미정 시 미소 / 구미정 내 첫 시집 축하 파티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챙겨줬던 고 구정혜 시인, 구미정 시에 공감 추억해 봤습니다. 1 들국화 2023.12.09 42
14 엄마생각 / 권영하 ** 페이스북에서 모심** 들국화 2024.01.05 31
13 꼬깃꼬깃한 저녁 / 박상조 ㅡ 꼬깃꼬깃한 저녁 ㅡ / 박상조 복직을 기다리던 날도 벌써 오래 고향에서 홀로 사는 친구가 항암 치료차 들렀다 가는 길이라고 했다 바싹 마르고 핼쑥해 보이는... 1 들국화 2024.01.10 60
12 사람 팔자 알 수 있나 / 이강흥 1 들국화 2024.02.12 48
11 틈 / 박상조 ㅡ 틈 ㅡ 박상조 어쩌면 우주 한쪽이 조금 벌어진 말 세상 밖에선 그저 실금이라고 어차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저 컴컴한 틈으로 꽃잎 한 장 떨어진다고 무슨 큰... 1 들국화 2024.03.08 46
10 자화상 / 서정주 (박수호 시 창작 카페서) 1 들국화 2024.03.19 43
9 이월 二月 이월 二月 겨우 이틀이거나 많아야 사흘 모자랄 뿐인데도 이월은 가난한 집 막내딸 같이 쑥스러운 달이다 입춘을 보듬고 있다 해도 겨울이 끝난 것도 아니고 봄이... 들국화 2024.03.31 23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Next
/ 9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