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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만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시 읽기 2> 자화상/서정주 서정주, 아마도 해방 이후 한국에서 제도권 내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경우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서정주이 이름은 이 땅에 널리 알려져 있고, 그는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손꼽혀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너무나도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이름과 시를 권위적인 교과서를 통하여 만나기 시작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진정 서정주이 시를 깊이 읽어보고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선입견을 다 던져버리고 서정주 시와 허심한 마음으로 직접 대면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면, 그의 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를 시인 중의 시인으로 손꼽는 데 주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서정주는 지금(2000년) 86세입니다. 그는 1915년생입니다. 1930년대에 활동한 시인 이상李箱이 1910년생이고, <서시>의 시인으로 사랑받아온 윤동주 역시 29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서정주는 이들과 동세대의 시인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상은 28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윤동주 역시 29세라는 나이에 잽싼 걸음으로 세상과 이별하였습니다. 시인은 오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희망적으로 보여준 서정주 시인도 요즈음을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심장에 물기가 말라가는 질병이라고 시인 스스로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아!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가 이 글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서정주의 부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는 2000년 12월 24일, 그가 오래 살았던 사당동 예술인 마을 자택에서 아내 방옥숙 여사가 세상을 떠난지 두어 달 남짓 된 시간에 그의 아내를 따라 이 세상과 이별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그가 이런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시인다운 말을 감동적으로 하였습니다. 그 왜 있지 않나? 나는 시인이니까. 내가 한 60년 넘도록 시를 써왔으니까. 그동안 내가 심장을 어지간히 흥분시키지 않았겠는가? 시인은 심장으로 시를 쓰는 것인데 내가 60년이 넘도록 시를 썼으니 심장병을 앓게 된 일은 아주 자연스럽고 시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네. 저는 서정주 시인의 이 말을 들으면서 불현 듯 그의 격정적인 초기 시가 떠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심장에 물기가 유난히도 많은 사람들, 그들이 시인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서정주의 심장에 그 어느 때보다도 물기가 많았던 시절의 시, 다시 말해 그의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격하게 요동치던 청년기의 시 <자화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백하건데 저는 제가 나이를 먹을수록 그가 청년기에 쓴 시 <자화상>이 더욱더 살을 에듯 제 몸 속으로 감동의 물결을 이루며 스며들곤 하는 것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참에 심장을 한 60년 넘도록 격하게 써왔으니 시인이 심장병을 앓는 것은 진정 시인답지 않느냐는 서정주의 말을 듣자 저는 그 말 앞에서 혼자 속울음을 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시인들이 다양한 형태로 ‘자화상’이란 제목으로 시를 씁니다. 많은 화가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자화상’이란 제목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디 예술가들뿐이겠습니까? 보통 사람들도 자신들의 자화상을 머리 속에 써보거나 그려봅니다. 아니 일기장 한구석에 써보거나 그려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낙서장에 자신의 자화상을 써보거나 그려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자화상을 떠올려 보았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다 자신들이 쓰거나 그린 이런 자화상에 대하여 상당한 애착을 가질 것이라 짐작됩니다. 자화상은 그만큼 우리의 나르시시즘적인 본능을 촉발합니다. 아니, 우리의 자아 검열 욕구를 채워줍니다. 저는 참으로 많은 시인들이 쓴 ‘자화상’이란 제목의 시를 읽어보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서정주의 <자화상>이야말로 우리 시단이 낳은 최고의 자화상이라고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섰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늘어트린 병든 수캐만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 전문 이 시는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1938)에 실려 있습니다. 사실 시인의 시쓰기란 ‘도대체 나란 누구인가?’ ‘도대체 나란 어떤 존재인가?’ ‘도대체 나는 진정으로 잘 살고 있는 것인가?’와 같은 물음을 갖는 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지요. 그런 물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시를 쓸 욕구가 생기지 않을 터이니까요. 여기서 좀더 확대시켜본다면 ‘세계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혹은 ‘세계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와 같은 물음을 갖기 시작할 때 시쓰기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없는 자가 어떻게 시를 쓸 수 있겠어요. 이런 점에서 서정주의 위 시는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한 ‘입사식 작품’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저의 자화상을 그려 보이기가 겁이 납니다. 자화상을 그려 보이려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의 깊이까지 심층적인 자기 분석을 감행해야 하고 그 분석 내용을 백일하에 고백해야 하는데 저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다리 말하면 아직도 제가 가면을 쓰고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는 징표일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제가 좋아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언제쯤 저도 제대로 된 자화상을 하나쯤 그려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적나라하게 심층적으로 자기 분석을 감행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고백하며 승화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한 인간은 그의 존재 전체, 그의 인생 전체와 화해를 이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서정주는 그의 시 <자화상>의 첫 구절은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하였습니다. 무척이나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저는 서정주의 이 고백적인 선언 앞에서 그와 손이 부스러질 정도로 깊고 따스한 악수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애비는 종이었다”는 이 말이야말로 ‘나는 종이었다’는 그 말보다도 더 고백하기 힘든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원한 바도 아닌데, 부모들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몸을 물려주고, 게다가 성까지 물려주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부모들은 그들의 신분까지도 함께 원하지 않는 우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누구의 아들이고 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항상 우리에게 애증의 대상입니다. 시인 장정일은 “아버지가 죽은 날 나는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습니다. 시인 기형도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라고 애원하며 병든 아버지가 넘겨준 무겁고 가난한 유산 앞에서 비틀거리며, 하교길에 “월말 고사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워버렸습니다. 그러나 장정일처럼 아버지가 죽은 날 만세를 불러도, 기형도처럼 가정방문을 거부해도, 아버지의 유산은 언제나 우리의 몸 속에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운명적인 ‘역사성’이라고 이러한 우리들을 가리켜 불가피한 ‘역사적 존재’라고 그럴듯한 추상적 용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 역사성과 역사의 연속성은 강한 폭력적 실체입니다. 끊으려 해도 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서정주는 “애비는 종이었다”는 고백으로부터 <자화상>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고백하지 않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도저히 만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애비는 종이었다”라고 고백할 때, 서정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실제로 서정주의 아버지는 그의 고향 고창에서 만석군 지주로 군림한, 현재 『동아일보』의 설립자이고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다고 합니다. 서정주의 고향 마을에 가서 서정주가 살았던 초라한 세 칸 집과 김성수 일가가 살았던 대궐 같은 집을 함께 본 사람은 당시의 정황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서정주가 여기서 고백하는 “애비는 종이었다”는 말이 사실과 다른 상상력의 산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 고백적이 문장으로부터 나라는 존재의 자기 규정이 독립된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아비로 상징되는 부모 혹은 조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이 사실을 직시하게 되고, 더 나아가 이런 인간 존재의 역사성 때문에 못난(?) 조상의 자식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무겁기 그지없는 운명적인 짐을 지고 허덕인다는 걸 인식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못난 조상의 자식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자화상을 써내려가야만 할 때, 아니 잘난 조상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 자체가 부담으로 작용할 때, ‘나는 고아이다’ ‘나는 부모도 조상도 없다’ ‘나는 나일뿐이다’라고 자신을 단독자로 규정하고 싶은 욕구를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차원을 넘어선 인간 존재의 솔직한 내면세계를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서정주는 ‘나는 고아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애비는 종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수락했습니다.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덮쳐온 운명과 화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해는 ‘아픈 화해’이자 ‘슬픈 화해’였습니다.그런 아버지는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고 말한 데서 드러나듯이 고단한 인생을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서정주의 집에는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자리에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나무 한 그루가 서서 집 안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는 얼마나 힘없는 존재인가요? 한그루의 대추나무 또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요? 그렇지만 이렇게 연약한 것들이라도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서정주의 어린 시절은 얼마간 위안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더 처량한 느낌을 받았을까요? 밤이 깊어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그 허허로운 집 안에, 연약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할머니와 대추나무만이 무심하게 한 그루 서 있던 것이 서정주의 집 안 풍경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자화상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내용입니다. 그에게 이것은 그의 자화상을 그리고자 할 때 잊을 수 없는 초벌그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서정주의 자화상 그리기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에서 할머니와 대추나무를 기억하는 것으로, 다시 할머니와 대추나무를 기억하는 것에서 어머니를 기억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차례로 기억의 실타래에 묻어 나온 서정주의 가족사 속에서, 어머니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그 풋살구를 먹을 수 없는, 가난한 가정의 임신부였습니다. 상상하건데 남편조차 들어오지 않는 깊은 밤에 달은 휘영청 밝게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임신부인 서정주의 어머니는 입덧을 하면서 달을 보고 풋살구가 먹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달을 보고 풋살구를 먹게 해달라고 소원을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먹고 싶은 풋살구를 이 임신부는 먹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 역시 종인 남편의 아내이며, 가난한 시대의 가난한 가정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서정주의 이것 속에 이것은 강력한 그림자로 남아 있습니다. 아아 그렇다면 이런 가정 속의 서정주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요? 서정주는 자신의 유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그는 종인 아비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풋살구를 먹을 수 없는 가난한 어미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아비와 어미의 아들인 서정주는 “흙으로 바람벽한” 초라한 집의, ‘호롱불’로 어둠을 가까스로 거두어내고 있는 가난한 집의 미처 부모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웠던 여유 없는 집의 손톱이 까만 시골 아이였던 것입니다. 방금 보았듯이 그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유년기의 소년입니다. 아버지도, 할머니도, 어머니도, 그에겐 후광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철부지 소년은 어렴풋이 그가 놓인 어둠의 자리, 슬픔의 자리, 비애의 자리, 고독의 자리, 서러움의 자리를 느낄 뿐입니다. 그가 이렇게 느낀 것은 그의 자화상에서 원형을 이룹니다. 이것은 도저히 떨쳐버리기 어려운, 그 자신을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바로 그 부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서정주의 자화상은 다시 그의 가족사를 기억하는 부분으로 또 이어집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아비의 아들이며, 어미의 아들이고, 할머니의 손자라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의 자화상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할아버지의 핏줄에 연속돼 있다는 점을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머니가 그렇듯이, 그의 외할아버지 또한 비극적인 운명을 짊어진 사람입니다. 서정주의 <자화상>에서 그 시구를 빌려 표현하자면 그의 외할아버지는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숱 많은 머리털”과 “크다란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서정주의 외할아버지는 고기잡이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인 것입니다. 그 비극적 주인공인 외할아버지와 서정주는 닮았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숱 많은 머리털”과 “크다란 눈”이 닮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서정주는 외할어버지의 몸을 이어받은 존재입니다. 이런 그가 그린 자화상엔 외할아버지가 함께 들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서정주의 자화상 속에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할머니가, 대추나무가, 외할아버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들의 슬픈 삶과 역사와 인생이 들어 있습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가족주의를 넘어서서 생각한다면, 실제로 그의 자화상 속에는 이 땅의 전 역사가 다 들어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을 쓴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런 해석이 가능하지요. 서정주는 이 시를 스물세 살에 썼나 봅니다. 그러니까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했겠지요. 가족사를 언급하는 것으로부터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서정주가 이제 그의 시 <자화상> 제1연 제7행부터는 자기 자신에게만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며 시상의 변화를 꾀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한 말이 바로 앞서 제시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을 지금까지 키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늘입니까? 사랑입니까? 친구입니까? 투쟁입니까? 희망입니까? 돈입니까? 공부입니까? 자연입니까? 함나디로 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들 대신 서정주가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티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한 이 충격적인 말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젊은 시절에 얼마나 마음 설레며 공감하곤 했습니까? 제가 저도 모르게 ‘우리’라는 표현을 썼군요. 정확하게 쓰자면 ‘저’라고 쓰는 것이 맞겠지만, 제 주변에 있는 많은 친구들이 이 말 앞에서 함께 가슴 두근거리며 공감하곤 했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서정주는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바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머지 2할의 여분을 남겨놓고 말했던 것입니다. 만약 8할이라는 말 대신 10할이라는 말을 썼다면 이 시의 매력은 많이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여백의 묘미를 잘 살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이 시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이 시구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십니까? 이 시구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시어는 말할 것도 없이 ‘바람’인데, 저는 이 말 앞에서 자유, 방황, 떠돎, 불안, 번뇌, 갈망, 초월, 흥분, 가변, 외침, 객기, 욕망 등과 같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은 한 인간을 키운 자양분이자 한 인간이 감당해야 할 불안한 운명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서정주는 이런 그의 생을 돌아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조금만 자기 성찰을 가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부끄러움은 자아 존중감과 겸허함의 결과물이지요. 서정주는 이런 부끄러움을 느끼며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라고 말했습니다. 개인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우주적인 문제, 그 모든 것들이 결합되면서 한 인간이 이 세계 속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부끄러움은 자멸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창조적인 부끄러움은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저는 부끄러움을 말하는 서정주의 ‘자화상’ 속에서 창조적인 부끄러움의 한 모습을 봅니다. 서정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라고 말입니다. 어떤 이가 서정주의 모습에서 ‘죄인’과 ‘천치’를 읽기 이전에 아마도 그 자신이 자신의 자화상에서 ‘죄인’과 ‘천치’의 모습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을 먼저 깊이 들여다본 것이지요. 그렇지만 모를 일이지요. 누군가가 그렇게 읽고 가는 것을 이 시인이 눈치챘는지도 말입니다. 어쨌든 좋아요. 무엇이 계기가 되었든 간에 그는 자신에게서 ‘죄인’과 ‘천치’의 모습을 보았고 그것은 그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쳤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죄인 아닌 자가 누가 있습니까? 또한 이 세상에 바보 아닌 자가 누가 있습니까? 그런 자신들의 그림자를 기어코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쓸 뿐이지요. 그런 그림자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남의 것으로 투사시켜 돌려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너무나도 정직하고 예민한 사람만이 그런 사실을 느끼면서 괴로워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서정주는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라고 그 자신을 긍정하며 부끄러움을 창조적인 단계로 끌어올리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자화상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는 뜻이라 여겨집니다. 부끄러운 존재, 죄인 같은 존재, 천치 같은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이지만, 그러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느냐, 그런 자신일지라도 사랑할 수밖에 더 있느냐, 우둔한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게 이 모양이라는 복잡한 목소리가 이 시구에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서정주는 제2연에 와서 그가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화상은 일상인으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삶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심장에 물기가 마르는 질병을 앓으며 고통스러워하는 그가, “시인이란 심장을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닌가! 흥분하고, 슬퍼하고, 감격하고, 불쌍해 하고……” “그러니 60년이 넘도록 심장을 과도하게 쓴 내가 심장병을 앓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라고 말한 것처럼 그의 자화상은 시를 쓰는 일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서정주는 시인으로 시를 써온 자신의 자화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앉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만냥 헐덕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가 쓴 <자화상>의 마지막 연을 다시 한 번 옮겨보았습니다. 위 인용 부분을 보건대 그는 몸에 시의 이슬을 달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이라는 말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시라는 이슬을 아침결의 풀잎처럼 그는 몸에 달고 살았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이슬이, 제아무리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결의 이슬이라 할지라도, “몇 방울의 피”를 언제나 섞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가 몸에 달고 다니는, 아니 몸으로부터 솟아난, 그 시의 이슬은 해맑은 순수의 동심 같은 천진무구한 이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아픔과 번뇌와 열정과 소망과 비탄과 방황이 들끓으며 녹아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뇌를 몸으로 감당하고 싶은, 비록 풋내나는 젊은 시절의 그것일지는 모르지만, 그의 진심을 다한 청춘의 뜨거운 피가 그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서정주는 이렇게 살아온 그의 시력을 가리켜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병든 수캐만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 시구에서 ‘헐떡거리며’라는 데로 자꾸만 눈길이 갑니다.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스물세 살의 청춘기, 그래서 볕인지 그늘인지 구별조차 가지 않는 혼돈기, 그렇지만 길을 찾아 몸을 불사르고 싶어 언제나 헐떡이는 발정기, 그 속에서 열정에 스스로의 몸이 달구어져 초월을 꿈꾼 이상기, 이 모든 것들이 앞의 시구 ‘헐떡거리며’ 속에 압축돼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약아집니다. 청춘 시절처럼 순진성과 열정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헐떡거리며’ 달리는 일이 줄어듭니다. 헐떡거리며 사는 그 무모한 순진성과 열정이 시대가 반드시 인생의 최고 단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을 위험하면서 아름답고, 서투르면서도 감격적인 시기로 기억됩니다. 서정주의 <자화상>에서 마지막 연을 읽고 나이와 관계없이 감동할 수 있는 것은 젊은이는 동감의 사간을, 나이 든 사람들은 추억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니, 아직도 “애비는 종이었다”고 고백하며 자화상의 첫 줄을 시작할 수 없었던 사람은 그가 누구든 간에 서정주의 이 고백 앞에서 한참을 멈춰설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 시를 읽은 이가 젊은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삶의 세련된 기교를 배우지 못해서 늘 세상일에 뒤뚱거리는 사람들이라면,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헐떡거리며’ 사는 자신을 서정주의 시에 이입시켜보며 위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사람을 빼어놓는다면 이 험난한 세상의 다리를 건너면서 뒤뚱거리거나 헐떡거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 시의 공감 영역이 넓어집니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해서 “병든 수캐만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로 끝나는 서정주의 이 <자화상>에서, 저는 운명이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가족사의 비극과 심장에 물기가 마를 때까지 시를 쓸 수 밖에 없었던 한 시인의 운명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운명은 슬프고 고단한 세계를 품고 있으면서도, 비극적 황홀감, 또는 초월을 꿈꾸는 자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스스로 가장 시인다운 질병을 앓고 있다는 서정주, 그의 심장에서 우러나온 시가 우리의 메마른 심장에 물기를 더해준다면 이것이 시의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서정주의 시로 인하여 참 많은 사람들의 메마른 심장에 물기가 촉촉이 깃들였을 것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3. |
나는 이 시 해설을 다 읽었다
요즘은 짧아도 잘 안 읽는 시
해설까지 유난히 긴 해설까지, 공감대가 끝까지 읽게 했다.
애비는 종이었다, 로 시작 병든 수캐처럼 헐떡거리며 걸어왔다,
이 자화상에 가슴이 촉촉해지는 공감대에 끌려 끝까지 읽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