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편지/윤승천 얘야, 봉답논 서 마지기 논바닥에 올챙이가 배를 뒤집고 죽어가던 그해 여름은 1982년이었단다 니가 스물 한 살이던 해였지 그해 따라 니 웃음 소리라 유난히 쩌렁쩌렁 너의 서울 사람과 더불어 이 갈리진 논바닥까지 넘나들고 니가 날마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스물 한 살 젊음을 위해 꿈꾸는 법을 배운다고 편질 할 때마다 애비는 기꺼워 미친 듯 헐떡이며 우물을 팠었지 말라비틀어진 감자는 고사하고 반쯤 생기다 만 강낭도 그나마 괜찮다만 너의 아름다운 서울 사랑을 위해 노랗게 시들다가 빨갛게 시들어가도 모 포기만은 살려야 했기에…… 끝내 비는 오지 않고 봉답논 서 마지기에 모 한 포기 살리지 못했으면서도 행여 니 하늘 같은 꿈에 금이라도 갈까봐 니 사랑의 푸름을 누가 업신여기기라도 할까봐 몰래 애비는 땀방울까지 쥐어짜면서 나한테 돈을 보내 주곤 했었지 얘야, 그렇게 그렇게 해를 보냈더니 어느덧 니가 졸업반이 되었구나 니만 믿고 살아온 애비 어미도 이제는 허리 좀 펴고 살 날 오겠구나 농사짓지 않고도 살 수가 있겠구나 남들은 샘이 나서 그런지 시방은 대학을 나와도 옛날과 다르다고 하더라만 어디 그런 사람들이 니만큼 알고나 하는 소리겠느냐 에미는 요즈음도 니 생각을 하느라고 고구마라도 빨리 캐야 니 주인집에 한 자루 보낼텐데 하면서 늦도록 잠을 자지 않다가도 제풀에 곤한 잠에 떨어진단다 널 키우랴 공부시키랴 쭈글쭈글해진 얼굴과 뭉툭한 손마디를 보면 공연히 나도 코끝이 시큰거려 돌아눕는다 아무튼 이제 니가 곧 졸업을 하게 된다니 무엇보다도 반갑고 기쁘구나 그러면서도 막상 졸업을 한다고 하니 어깨춤이라도 추어야 할텐데 춤은 고사하고 오히려 뒷바라지란 4년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주책스럽게 눈물은 왜 나는지 모르겠다 오냐오냐 남들도 다 졸업할 무렵이면 돈은 더 많이 든다고 하더라 오늘 장날에 고추와 마늘이 팔리는 대로 곧 보내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다른 학생들에 비시받히지* 않도록 하면서 환절기에 특히 감기 조심하고 부디 몸성히 잘 있거라. *비시받히지─‘업신여기지’의 경상도 방언. <시 읽기> 아버지의 편지/윤승천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쓰고 났더니 틀린 맞춤법으로, 구식 글자체로, 누런 백로지 위에, 뭉툭해진 손마디로, 대처에 나가 공부하는 딸에게 보낸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들고 한 여학생이 흘린 눈물과 그가 보인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표정이 먼저 떠오릅니다. 저는 이 여학생의 눈물과 이 여학생이 촌부인 아버지에 대해 연민과 사랑을 느꼈을 때의 그 표정을, 선생인 저에게 그가 습작으로 써낸 시와 과제로 제출한 리포트를 읽는 동안 저의 코끝은 계속해서 찡-한 울림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여기 윤승천 시인의 시 <아버지의 편지>가 있습니다. 이 편지 속의 아버지는 농사짓는 일밖에 모르는 시골의 전형적인 농부입니다. 지식도, 경제력도, 명예도, 그야말로 세속에서 높이 평가하는 그 무엇도 당당히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촌부일 뿐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대처로 나가 대학 공부를 하는 자식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글이 시의 형태를 띠고 윤승천에 의하여 발표된 게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감상할 작품 <아버지의 편지>입니다. 물론 이 시는 제목이 ‘아버지의 편지’이지만 시인의 아버지가 직접 쓴 글이 아니라 윤승천 시인이 지은 글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기 내용은 윤승천 시인이 아버지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어서 옮겨놓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옛날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당시, 시골 동네마다 편지를 대필해주는가 하면 배달된 편지를 읽어주는 사람이 있던 사실을 적어도 나이 40이 넘은 시골 출신들은 대부분 알 것입니다. 그러고 이 시 속의 편지는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을 윤승천 시인이 대필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시 읽어주는 여자’라고 자처하는 제가 그 편지를 여러분들에게 읽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의 전문을 다음과 같습니다. 얘야, 봉답논 서 마지기 논바닥에 올챙이가 배를 뒤집고 죽어가던 그해 여름은 1982년이었단다 니가 스물 한 살이던 해였지 그해 따라 니 웃음 소리라 유난히 쩌렁쩌렁 너의 서울 사람과 더불어 이 갈리진 논바닥까지 넘나들고 니가 날마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스물 한 살 젊음을 위해 꿈꾸는 법을 배운다고 편질 할 때마다 애비는 기꺼워 미친 듯 헐떡이며 우물을 팠었지 말라비틀어진 감자는 고사하고 반쯤 생기다 만 강낭도 그나마 괜찮다만 너의 아름다운 서울 사랑을 위해 노랗게 시들다가 빨갛게 시들어가도 모 포기만은 살려야 했기에…… 끝내 비는 오지 않고 봉답논 서 마지기에 모 한 포기 살리지 못했으면서도 행여 니 하늘 같은 꿈에 금이라도 갈까봐 니 사랑의 푸름을 누가 업신여기기라도 할까봐 몰래 애비는 땀방울까지 쥐어짜면서 나한테 돈을 보내 주곤 했었지 얘야, 그렇게 그렇게 해를 보냈더니 어느덧 니가 졸업반이 되었구나 니만 믿고 살아온 애비 어미도 이제는 허리 좀 펴고 살 날 오겠구나 농사짓지 않고도 살 수가 있겠구나 남들은 샘이 나서 그런지 시방은 대학을 나와도 옛날과 다르다고 하더라만 어디 그런 사람들이 니만큼 알고나 하는 소리겠느냐 에미는 요즈음도 니 생각을 하느라고 고구마라도 빨리 캐야 니 주인집에 한 자루 보낼텐데 하면서 늦도록 잠을 자지 않다가도 제풀에 곤한 잠에 떨어진단다 널 키우랴 공부시키랴 쭈글쭈글해진 얼굴과 뭉툭한 손마디를 보면 공연히 나도 코끝이 시큰거려 돌아눕는다 아무튼 이제 니가 곧 졸업을 하게 된다니 무엇보다도 반갑고 기쁘구나 그러면서도 막상 졸업을 한다고 하니 어깨춤이라도 추어야 할텐데 춤은 고사하고 오히려 뒷바라지란 4년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주책스럽게 눈물은 왜 나는지 모르겠다 오냐오냐 남들도 다 졸업할 무렵이면 돈은 더 많이 든다고 하더라 오늘 장날에 고추와 마늘이 팔리는 대로 곧 보내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다른 학생들에 비시받히지* 않도록 하면서 환절기에 특히 감기 조심하고 부디 몸성히 잘 있거라. *비시받히지─‘업신여기지’의 경상도 방언. 지식이 대단한 아버지, 명예가 대단한 아버지, 경제력이 엄청난 아버지, 그야말로 세속의 모든 것을 다 갖추어서 아버지의 그 권력과 후광이 늘상 든든하게 자신을 받쳐주고 그 그늘 아래서 아버지에 대한 자긍심까지 갖고 있는 행복한(?)사람은 윤승천의 위 시에 나타난 아버지의 편지 내용으로부터 크게 공감을 받을 수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저는 방금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좀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무척이나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부모란 내가 선택해서 인연을 맺은 존재가 아닌데, 어느 날 태어나보니 그렇게 대단한(?) 아버지가 그를 맞이하고, 태어난 자식은 그런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에요. 그러나 이 땅에서 그런 아버지를 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특히 전 국민의 80% 정도가 부농도 아닌 중농이나 빈농이었던 시절, 국민 한 사람당 소득을 가늠하는 GNP가 몇백 달러에 머물던 저 1950년대와 1960년대가 불과 몇 십년 전이고, 그보다는 나았지만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과 경제 발전이라는 말 앞에서 모든 것이 부차적인 수밖에 없었던 1970년대까지도 거리마다 마을마다, 학교마다, ‘잘살아보세/잘살아보세/우리도 한번/잘살아보세’라는 가사의 노래가 확성기와 국민들의 입을 통하여 아침저녁으로 울려 퍼지며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 이것이 국민 모두의 최고 목표로 설정되었던 바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땅에서 지식과 부와 명예의 3박자를 갖추고 자식의 든든한 후원자와 후광이 되어주는 아버지를 우리가 얼마나 만날 수 있겠습니까? 위 시에서 아버지가 편지를 보낸 시점을 1980년대로 돼 있습니다. 1980년대라면 그래도 이전보다 상당한 경제발전이 이룩된 시절입니다. 하지만 돈은 도시로 흘러들었고, 더 많은 먹잇감이 흘러 다니는 그 도시를 향하여 수많은 사람들은 1970년대에 이어 이때에도 이농을 하기에 분주했습니다. 인간들이 삶의 터전을 옮기는 대부분의 이유가 더 좋은 먹잇감을 더 쉽게 얻을 수 있기 위한 것임은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전개돼온 인간사의 기본 원리이니, 이런 도시로의 이농 현상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인간들이 삶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윤승천이 시 <아버지의 편지>에 나오는 아버지는 이농을 하지 않고 농촌에서 머물러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는 더 좋고 큰 먹잇감이 도시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런 도시를 거부한 사람일까요?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도시는 자식대의 것이고, 자신은 농촌에 사는 것이 적합한 존재라고 느낀 사람일까요? 또 이 모든 것이 다 아니라면,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 두려웠던 사람일까요? 작품만 보고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이 모든 가능성을 다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요. 이제 인용한 시의 본문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저는 우선 이 시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로 감상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편지의 내용을 문명사의 변화 과정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문제와 관련 시켜서 해석하고 감상하겠습니다. 위 시의 주인공인 아버지는 농부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에 의해서 언급되는 부주인공 격의 어머니 역시 농부입니다. 시의 내용으로 볼 때 그들은 많지 않은 농토에 의지해서 농사를 짓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대학에 보냈던 몇 년간의 시절 중 구체적으로 연도가 언급된 1982년은 너무나도 비가 오지 않은 가뭄의 해였던 것 같습니다. 가뭄 앞에서 하늘만 쳐다보며 애간장을 태워야 했던 아버지는 그해의 여름을 “봉답논 서 마지기 논바닥에/올챙이가 배를 뒤집고 죽어가던” 여름으로 묘사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농촌의 가뭄을 아십니까? 저도 잘은 모르지만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저는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 위를 올챙이가 하얗게 배를 뒤집고 가득히 죽어 있던 풍경을 본 바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가뭄이 더해지면 배를 하얗게 뒤집고 죽어 있던 올챙이들이 말라비틀어지면 그 몸의 형체를 지워가던 모습도 본 바가 있습니다. 이런 가뭄을 맞이하여 벼 한 포기가 곧 밥이고 돈이고 자존심인 시인의 아버지는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을 어루만지며 가뭄의 현장을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농부인 아버지와 그의 아내인 시인의 어머니는 아들을 서울이라는 대처로 내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나 어머니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도, 그의 부모도 그것을 원했기에, 그렇게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단순히 그런 길을 원한 정도가 아니라 그런 길을 택하는 것이 더 가치 있고, 성공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여겼기에 그런 길을 택한 것이며, 그런 길을 택한 것에 자랑스러움과 기대감까지도 흠뻑 갖고 있는 터입니다.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한다면 자랑스러움과 기대감을 넘어 대학생이 된 시인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구원해줄 아주 고귀한 존재로까지 생각되었습니다. 대처와 대학은 그런 장밋빛 청사진을 안겨주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뭄이 든다는 것은 그런 청사진을 현실로 만드는 데 치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갖고 <아버지의 편지>속의 나오는 아버지도, 또 어머니도 아들을 대처의 대학에 입학시킨 것같이 읽힙니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고된 낮일을 마치고 나방이 날아드는 등불 아래서 졸업반을 맞이한 아들에게 편지를 써보낸 것입니다. 그는 편지를 쓰는 동안 아들을 대학에 입학을 시키고 졸업반이 되기까지의 이런저런 추억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간혹 아들의 미래와 자신들의 미래까지도 그려보곤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대학 시절과 관련된 추억 가운데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앞서 말한 가뭄과, 그 가뭄 속에서도 스물한 살 청춘이었던 아들의 그 유난히 쩌렁쩌렁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기뻐하던 일, 더욱이 “날마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스물 한 살 젊음을 위해 꿈꾸는 법을 배운다”고 편지하던 때의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스물한 살! 그야말로 상상한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시절입니다. 물론 이 나이에는 모든 것이 미완의 장으로 남아 있기에 은근한 불안의 그림자가 삶의 밑자리로 어른거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 본 척할 만큼, 아니 그것을 이겨낼 것 같은 패기 때문에, 이 시절의 젊은이들은 ‘꿈꾸는 법’을 잊지 않고, 그 꿈의 높이를 높여가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20대를 통과해본 사람들은 대부분 다 이런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건대 꿈꾸는 법을 막 배우기 시작하는 그 20대의 초반에, 우리의 옷음소리는 얼마나 쩌렁쩌렁하고 우리의 꿈 높이는 얼마나 무모하리만큼 높고 순결합니까? 인생에서 최고의 이상주의자로 얼굴이 상기되는 시기, 그 시기가 바로 20대 초반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윤승천의 시 <아버지의 편지> 속에 나오는 아버지는 대처로 나간 이런 아들의 꿈꾸는 법과 웃음소리를 듣고 황홀해합니다. 그가 젊음의 시간을 대신 맞이한 듯 말입니다. 그 황홀한 기쁨과 젊음이 가져다 주는 벅찬 감정 때문에 격앙될 대로 격앙된 아버지는 그것을 힘으로 삼아 “기꺼워 미친 듯 헐떡이며 우물을” 파며 가뭄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아들의 꿈꾸는 법과 쩌렁쩌렁한 아들의 웃음소리가 고단한 노동과 가뭄까지도 넘어서게 만드는 일은 신비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뭄은 더욱 계속되었고, 그 가뭄을 이겨내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었음을 아버지는 고백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아들에게 알릴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버지는 스물한 살 젊은 아들이 꿈꾸는 모습과 그의 구김 없는 웃음소리를 지독히도 아끼고 사랑한 까닭입니다. 아버지는 이런 자신의 심정을 제17행에서 20행까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행여 니 하늘 같은 꿈에 금이라도 갈까봐 니 사랑의 푸름을 누가 업신여기기라도 할까봐 몰래 애비는 땀방울까지 쥐어짜면서 나한테 돈을 보내 주곤 했었지 여기서 보듯이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가진 하늘 같은 꿈에 글이라도 갈까 봐 염려했던 것이고, 자신의 가난으로 인해 아들이 누군가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을까 봐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는 아들의 꿈과 아들의 자존심을 고스란히 지켜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가난한 아버지의 꿈과 자존심을 지키려는 안간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부른 시절이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소를 팔아서 아들딸 공부시킨 대학은 소뼈로 쌓아올려진, 말 그대로 ‘우골탑’이나 마찬가지였다는 비유이지요. 누가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이라고 불렀습니까? 이 말은 매우 사치스러운 말인지도 모릅니다. 이쯤에서 저는 이 땅의 수많은 아들딸의 대학 공부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착한 소들이 그 큰 두 눈을 껌벅이며 영문도 모른 채 집을 떠났을 것이며 날마다 논밭일을 감당하며 저녁마다 신음소리를 냈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이쯤에서 또 한 가지 생각을 해봅니다. 제아무리 가난한 가정이라 하더라도, 스물한 살 젊음을 위해 꿈꾸는 법을 배운다고 아들이 편지를 할 때마다 그 아들이 꿈을 이해하고 기쁨으로 헐떡이는 아버지를 둔 사람, 행여 아들의 하늘 같은 그 꿈에 금이라도 가고 그 아들이 가난 때문에 누군가에게 업신여김이라도 당할까 봐 땀방울까지 쥐어짜며 아들을 아끼는, 그런 아버지를 둔 사람이라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위 시의 중간쯤에 이르면 그렇게 뒷바라지한 아들은 이제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졸업반이 된 아들을 보면서 대처와 대학과 아들에 기대를 걸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선 기쁩니다. 졸업을 하게 되면 학비가 더 들지 않아도 될 것이요. 대학생인 아들만 믿고 살아온 제 허리를 좀 펴고 살 날이 오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아들 덕에 농사짓지 않고도 살 수가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대처와 대학과 아들이 모든 문제 해결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데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대처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은, 대학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1980년대로 오면 지신의 미래는 물론 가족의 미래까지 구원할 만한 일이 되기 어려워져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기대와 달리 대학을 나온 아들이 겨우 대처에서 취직을 하였다 하더라도 대처란 가혹한 곳이어서 자수성가하며 가정을 이뤄야 할 시골 출신의 가난한 아들은, 제 한 몸 돌보기조차 호락호락하지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시골 마을에도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는지, 아버지가 보낸 편지 속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습니다. 시방은 대학을 나와도 옛날과 다르다고 하더라만 그러나 아버지는 이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직도 대처와 대학과 아들이 자신이 품었던 희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으며, 그렇게 믿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런 말들을 이웃들의 시샘으로 돌려버립니다. 시골 동네에서 대학에 간 젊은이는 198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아주 드물었지요. 자식을 대학에 보낸 부모나, 대학에 간 젊은이는 모두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지요. 대처와 대학은 그만큼 이 시대에 힘이 세었습니다. 그런 시대 앞에서 대처와 대학에 자식을 내보내지 못한 사람이나 그곳에 가지 못한 젊은이는 열등감으로 허덕여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반의 아들을 둔 아버지는 지난 4년간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립니다. 이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자, 자기 연민의 눈물일 것입니다. 내가 남들이 하기 어려운 아들의 대학 뒷바라지를 무사히 마쳤다는 기쁨과 4년 동안 아들이 뒷바라지를 위해 겪었던 어려움의 시간들을 생각할 때 나오는 자기 연민의 눈물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눈물을 추스르며 아들에게 다시 당부합니다. 졸업할 무렵이면 이런저런 일로 돈이 더 많이 든다고 하는데, 농사지은 고추와 마늘 등을 팔아서 돈을 부쳐줄 터이니, 아무 걱정 말고, 다른 학생들에게 업신여김 당하지 말고, 건강한 몸으로 졸업 날까지 학창 생활를 네 가꿈꾸었던 대로 마무리지으라고……. 윤승천의 시 <아버지의 편지>는 이와 같은 내용을 담으면서 “환절기에 특히 감기 조심하고/부디 몸성히 잘 있거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런 사적인 사연만으로 이 시를 이해해서는 조금 곤란합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문명사의 변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보편적인 해석을 하며 이 시를 좀더 감상하겠습니다. 인류 문명사는 크게 네 단계를 거쳐왔습니다. 그것은 원시수렵 및 채취시대, 농경 및 축산시대, 산업화시대, 그리고 최근 들어 나타난 정보화시대입니다. 이 문명사의 변화 양상에 따라 권력은 계속하여 이동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권력이 산출되는 곳을 찾아가고, 그곳을 가치 있는 곳으로 여기게 마련입니다. 농경사회를 넘어 산업화시대로 오면서 권력은 농경지와 농작물에서 나오지 않고 도시와 공장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농부의 근육질이 가진 힘을 지식인의 머리가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업화시대가 시작된 때를 도시와 물건과 시장 그리고 돈이 중심이 된 근대의 시발점으로 본다면, 이 근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식과 지식인이 대접을 받은 시기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 세계 각국에 근대와 지식 혹은 지식인을 상징하는 대학이 도시를 중심으로 생기기 시작하였고,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근대의 지식을 익힌 지식인으로서 특별한 권력을 획득하고 사화로부터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나이가 50세 전후쯤 되거나 그 이상이 되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농경사회적 삶을 살고 있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산업사회가 다가왔고, 이어서 정보화사회를 맞이한 사람들입니다. 생각하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다양한 사회가 그들의 일생을 스쳐 갔습니다. 그런데 본래 농경사회에서 살았었던 만큼 그들은 농경사회적 사유방식을 가지고 자식을 낳았습니다. 자식이 곧 노동력이던 사고 방식을 그들은 가졌기에 겁 없이(?) 자식을 낳았습니다. 제가 먹을 것은 제가 타고 나온다는 사고방식으로 아이를 낳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런 농경사회적 사고방식으로 낳은 자식들을 산업사회 혹은 근대사회에 맞는 인물로 교육시켜야 하는 변화가 몰아쳐왔습니다. 곧 산업사회와 근대사회가 닥쳐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당이나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농사짓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낳은 자실들을 대처에 나가거나 대처로 내보내서 대학까지 공부시켜야만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는 시대를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농경사회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부모들 자신이 산업사회 혹은 근대사회에 적합한 인물이 되어 쌀이 아닌 돈을 벌어들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농경사회 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식들만을 산업사회와 근대사회에 적합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 가능한 한 더 높은 단계의 학교까지 졸업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이농을 하여 도회지로 나간다 하더라도 그들은 대부분 도시 빈민으로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산업사회와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기술과 지식을 획득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이런 가운데 산업사회와 근대사회는 도시와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을 만들어놓고 그곳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농경사회적 사유방식에서 등을 돌리고 새롭게 도래한 사회에 맞추어 살아가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 결과물로 나타난 한 가지 모습이 도시에서 자식들을 고등교육까지 마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입니다.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저 변산반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잡초는 없다』라는 책을 쓴 윤구병 씨는 제 후손들을 공부시키는 데 돈 주고(그것도 아주 많은 돈을 주고) 공부시키는 것은 이 시대의 인간밖에 없다고 지적하며 새로운 교육공동체를 꿈꾼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어느 한 생물종이 제 후손들을 가르쳐서 역사를 잘 이어가게 하려고 하는데 돈 주고 하는 경우는 인간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인 근대사회는 모든 것을 돈으로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돈이 없는 사람은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가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권력으로서의 중심 기능을 상실한 쌀을 시장에서 돈으로 바꿔야 하는 농경사회 속의 농부들은 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산업사회적 인간 혹으느 근대적 인간ㅇㄹ 만들어내는 곳(대학)이 저기에 보이는데 그곳을 못 본 척하며 돌아서기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승천이 시 <아버지의 편지> 등장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 문명사적 변화 과정 속에 끼인 희생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명사의 변화란 냉혹한 것이라서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를 구석으로 밀어 버리고 맙니다. 사라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잘 알고 있기에 새로운 문명사의 패턴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자신이 적응하지 못하면 자식을 통해서라도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미 산업사회적 인간 혹은 자본주의적 근대사회의 인간으로 성장하여 아동학을 하는 분들이 아이를 낳는 일과 관련해서 들려주는 충고의 제1조 제1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한다고 아이를 무작정 낳아서는 안 된다. 제가 먹을 것을 제가 갖고 태어난다는 믿음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이를 낳으려거든 반드시 당신의 평생소득을 계산해보고 자식에게 들어갈 총비용을 점검한 후에 낳아라.’ 좀 비정한 말 같습니까?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이니까요. 또 다른 문명사회가 도래하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현재로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이 자립하는 데 약 30년 가까운 시간의 후원이 부모이든, 그 누구에 의해서든 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유아기는 그렇다면 30여년이 되는 것인가요? 열다섯 살만 돼도 부모의 농사일을 거들어줄 수 있었던 농경사회와 비교해 볼 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참으로 긴 기간 동안 자식을 아이처럼 길러야 하는 시대입니다. 윤승천 시 <아버지의 편지>는 바로 이런 문제들을 생생한 실감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 |
2024.06.20 15:21
아버지의 편지/윤승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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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 들국화
관리자 입니다.
위의 시를 읽으며 코끝이 찡해진 것은 1982년이면,
우리 아들이 두 살 때인데,
돌이켜보면 참 꿈도 컸었지, 보리, 쌀 혼합곡으로 끼니를 연명하면서도
자식 공부만큼은 시켜야 한다고 대학은 나와야 손에 흙 안 묻히고 살 수 있다고
땡전 한 푼 없는 아버지 막노동으로 돈을 모아 교육 보험이란 것도 열심히 저축했었지,
세월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흘러 흘러서
칠십 중 반에 들어 이 시를 읽게 되니
나의 지난날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