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총기/고진하 영혼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센 듯 싶은 팔순의 어머니는 뜰의 잡풀을 뽑으시다가 마루의 먼지를 훔치시다가 손주와 함께 찬밥을 물에 말아 잡수시다가 먼산을 넋놓고 바라보시다가 무슨 노여움도 없이 고만 죽어야지, 죽어야지 습관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이젠 섭섭지 않다 치매에 걸린 세상은 죽음도 붕괴도 잊고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죽음의 속도로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마른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 팔순 어머니의 총기聰氣! <시 읽기> 어머니의 총기/고진하 고진하는 강원도 시골 마을의 한 작은 교회를 이끄는 목사입니다. 그는 목사이자 시인인 셈입니다. 저는 고진하의 이력을 만날 때마다 궁전보다 화려한 교회들도 많고 많은데 하필이며 왜 강원도의 그 허름한 시골 마을로 숨어들어 작디작은 교회의 목사로 살아가는지 그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싶어집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강원도, 이미 영리한 사람들은 다 떠나고 어쩔 수 없는 사람들만 남은 쓸쓸한 시골 마을, 그 곳의 작은 교회, 그 교회를 이끄는 시인 목사, 그가 바로 고진하입니다. 고진하가 이런 시골마을이 교회를 이끌면서 그곳에서 느낀 심정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한 시는 그의 첫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자기엔』 속의 한 작품 <빈들>입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빈들> 전문 그렇습니다. 그가 찾아간 시골 마을은 위의 인용 작품 <빈들>이 말해주듯이 “늦가을 바람에//마름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과 같은 곳입니다. 그곳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희망’도, ‘사람’도, ‘내일’도 없는 황량한 땅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이런 ‘빈들’을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신과 더불어 찾아들었습니다. 황량해진 ‘빈들’을 그는 신과 손잡고 ‘희망’의 들로, ‘내일’의 들로, “가득 채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고진하는 개신교계의 목사입니다. 이런 선입견을 갖고 보면 그의 시가 기독교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실제로 고진하의 시는 이런 선입견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열려 있습니다. 그는 좁은 의미의 기독교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매우 폭넓은 종교적 탐색을 근원적으로 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본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진하의 시를 읽고 그와 공감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고진하가 『얼음 수도원』이라는 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첫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에서부터 시작된 그이 종교적인 영혼 탐구가 이 시집에 이르러 무르익은 느낌을 줍니다. 그는 시집의 제목이자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얼음 수도원>에서 인간이 지닌 영혼의 가장 드높은 단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니다. 드높은 영혼은 매장되고, 값싼 쾌락만이 길거리를 뒤덮은 이 시대에 그의 이와 같은 고상한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진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웬 영혼이람?’하면서 비웃는 표정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몸 속 깊은 곳에 드높은 영혼을 갈구하는 소망이 자리해 있다면 그의 이런 모습이 영영 남의 것 같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고진하의 시집 『얼음 수도원』 속에 들어 있는 한 작품 <어머니의 총기聰氣>를 여러분들과 함께 감상하고자 합니다. 제목만 보면 조금 진부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실제로 시작품을 만나보면 그런 생각이 사라질 것입니다.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센 듯 싶은 팔순의 어머니는 뜰의 잡풀을 뽑으시다가 마루의 먼지를 훔치시다가 손주와 함께 찬밥을 물에 말아 잡수시다가 먼산을 넋놓고 바라보시다가 무슨 노여움도 없이 고만 죽어야지, 죽어야지 습관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이젠 섭섭지 않다 치매에 걸린 세상은 죽음도 붕괴도 잊고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죽음의 속도로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마른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 팔순 어머니의 총기聰氣! ─<어머니의 총기> 전문 어머니, 그것도 연로한 어머니를 시의 소재로 삼는 것은 상당히 지루한 경우에 속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소재를 그동안 이 속에서 사용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그것도 연로한 어머니는 그 자체로 시적인 울림을 갖고 있습니다. 그만큼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특별히 연로한 어머니는 인간사의 모든 아픔과 비의를 숨기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나 연로한 어머니는 자주 사용된 시의 소재이기 때문에 이 소재를 다룰 때는 특별한 배려와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의 삶 속에서 어머니나 연로한 어머니가 주는 시적 울림보다도 오히려 그 울림의 측면에서 부족한 시를 만들어내기가 쉬운 까닭입니다. 앞의 인용된 고진하의 시는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런 위험성을 잘 비켜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 점을 염두에 두변서 앞에 인용된 고진하의 시 <어머니의 총기>를 감상해보기로 합시다. 고진하의 위 시는 표면적으로 연로한 어머니를 등장시키고 있지만 사실을 ‘죽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셈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 땅에 존재하는 까닭은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모든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 속에서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실제로 그 누구도 죽어볼 수 없고, 또 그 죽음 이후를 명료하게 예측하거나 알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사실적인 한 사건일 뿐, 그것 이상의 어떤 것도 우리는 실증적으로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앞의 인용 시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팔순을 맞이한 어머니’인 것입니다. 회갑을 넘어, 칠순을 넘어, 팔순을 맞이한 어머니인 것입니다. 그 어머니에게서 고진하는 몇 가지 사실을 읽어냈습니다. 그 몇 가지란, 첫째, 팔순의 어머니는 육체로서의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영혼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세었다는 것입니다. 하얀 머리카락과 하얀 영혼은 청춘의 질퍽거리는 속기를 털어낸 표정입니다. 우리는 하얀 머리카락 앞에서, 그리고 하얗게 표백된 영혼 앞에서 헐떡이는 욕정이 가라앉는 신선한 체험을 합니다. 둘째, 팔순의 어머니는 “무슨 노여움도 없이” 죽음에 대해 언급하곤 한다는 것입니다. 노여움이 없는 순간은 고요합니다. 그것은 비어 있는 세계입니다. 그것을 ‘무념무상의 설원’과 같은 표정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노여움조차 없는 말들 앞에서 말이라면 으레 안고 있는 이기적인 욕망의 용트림을 조금이라도 피해볼 수 있습니다. 노여움이 없는 말, 그것은 모든 무거움을 넘어선 가벼운 말입니다. 그것은 자정된 탈속의 언어입니다. 셋째, 팔순의 어머니는 “마른 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마른 풀처럼 시”드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대지를 향하여 가라앉던 몸이 하늘을 향하여 떠오르는 느낌을 받습니다. 마른 풀처럼 시드는 인간의 몸 앞에서 우리는 어떤 인간적 욕망도 더할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른 풀처럼 시”드는 가운데 “돌아갈 때를 기억”하는 한 인간을 볼 때, 우리는 탈속의 자유로움을 맛보는데서 더 나아가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돌아갈 때를 알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겸허히 수용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노여움 없이 죽음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단계가 될까요? 고진하는 “마른 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 팔순의 어머니를 보며 , 그에게서 빛나는 “총기”를 보았다. 총명한 기운이란 뜻의 ‘총기’란 말을 참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총명한 기운은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만 깃들입니다. 영혼이 맑지 않다면 우리의 모든 판단과 행위는 언제나 우리의 끝없는 욕망에 지배받을 것입니다. 저는 앞의 인용 시에 나온 팔순의 노모를 보며 색色의 세계를 지나 공空의 세계로 가는 한 영혼을 만나는 듯합니다. 색의 세계는 인간사를 몰고 가는 원동력이지만 공의 세계는 우주사를 맞이하는 손길입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시간은 인간사로 뒤척이는 욕망의 시간이지만, 죽음의 시간은 우주사로 건너가는 출가의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머니의 총기> 속에서 팔순의 노모를 통하여 출가의 시간을 미리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고진하의 시 <어머니의 총기>가 진부한 어머니 시편으로 끝나지 않은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팔순의 노모를 통하여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외에도 또 한 가지 원인을 더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 속의 어머니가 관념적인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아주 구제적인 생활 속의 한 존재라는 점입니다. 위 시 속의 어머니는 지금 이곳에서 시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는 시인이 눈에 “뜰의 잡풀을 뽑으시”고, “마루의 먼지를 훔치시”고, “손주와 함께 찬밥을 물에 말아 잡수시”고, “먼산을 넋놓고 바라보시”고, “고만 죽어야지, 죽어야지/습관처럼 말씀하시”고, “영혼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센 듯 싶”고, “마른 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곁에서, 시인은 어머니의 모습을 가감 없이 차분하게 잘 관찰함으로써 어머니의 실상을 실감 있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 인간이 늙어간다는 것은 애처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진하는 팔순이 된 늙 은 어머니의 애처러운 모습을 색다른 세계로 변주시키는 재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며 팔순의 연로한 어머니는 분명 애처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을 살짝 벗어난 입장에서 팔순의 연로한 어머니를 보면 그 어머니는 신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얀 영혼을 가진 자요. 서두를 것 없이 일상을 고요하게 오가는 자입니다. 이렇게 인간적 차원을 비껴 선 자리에서 팔순의 노모를 바라다볼 때, 우리는 색다른 인식과 감동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총기>에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어머니의 삶과 대비되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고진하는 자신의 팔순 노모가 돌아갈 때를 기억할 만큼 총기를 갖고 있음에 비해, 욕망으로 들끓는 이 세상은 돌아갈 때를 알지 못하는 ‘치매’ 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팔순의 노모가 욕망을 하얗게 표백시키고 돌아갈 날을 기억하는 것과 달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앞만 보고 달리며 끝도 없는 질주 속에서 “죽음도 붕괴도 잊고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말합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유일한 꿈은 자기 복제와 자기 확장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사실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인간들이 자기 복제와 자기 확장을 위한 욕망은 놀랄 만큼 대단합니다. 인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 복제와 자기 확장의 선두 주자가 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들은 시계를 차고 허둥댑니다. 그들은 불을 켜고 밤조차 몰아내며 야단입니다. 그들을 미래만이 있다고 소리지릅니다. 그들은 미래로 달려가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미래는 그들이 일등 주자가 되어 도달하고 싶어하는 가슴 설레는 땅입니다. ‘치매’에 걸리지 않고서는 인간들이 이렇게 맹목적인 열정 속에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자기 복제와 자기 확장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이 시대의 인간들은 철저하게 ‘치매;의 증세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어디 이 시대의 인간들뿐이겠습니까? 인간이란 그가 어느 시대의 인간이든지 간에 기본적으로 이런 치매적 속성을 갖고 살아갔겠지요. 그러나 그 정도에 있어서 이 시대의 인간들은 진정 최고의 수준을 자랑합니다. 치매가 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세계, 그것이 속도와 문명과 파괴의 이름을 가진 이 시대입니다. 고진하는 이런 시대를 보면서 위태로움과 한기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조금만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죽음의 속도로/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 이 시대를 보고 위태로움과 한기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질주만이 있을 뿐, 근원으로의 돌아감은 없는 시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표정입니다. 고진하는 근원과 궁극을 앞에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인입니다. 근원과 궁극을 생각하는 사람에겐, 인간이 이 땅에서 자기 복제와 자기 확장을 위해 만든 모든 문명과 형상이 바벨탑처럼 위태롭고 허망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사람들에겐 근원과 궁극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 복제와 자기 확장의 결과물인 문명과 형식에 전 생애를 바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늘비하게 줄지어 가는 땅에서, 고진하는 “영혼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센 듯 싶은” “팔순이 어머니”를 통하여 당신들이 서 있는 자리를 의심해보라고 경고를 하는 셈입니다. 그 경고는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이다. 치매에 걸린 세상과 그 속의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질주하는 그 모습과 그 속력보다 더 소중한 것은 “마른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 팔순 어머니의 총기”가 아니겠느냐고…….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팔순의 연로한 어머니는 무력하기 그지없는 존재이지만, 그 팔순의 노모는 노현자老賢子처럼, 아니 노자 노자처럼, 질주하는 우리의 발길을 슬쩍 붙들어놓고 근원과 궁극이 세계에 대하여 조용히 생각해보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속도와 무모한 열정 앞에서 남감해지거든, 고진하의 시 <어머니의 총기>에 나오는 팔순 노모의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세상의 파괴력과 죽음의 세력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겠거든 역시 고진하의 시 <어머니의 총기>에 나오는 팔순 노모의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팔순 노모는 당신들이 이 세상에서 허덕일 때 노현자의 얼굴을 하고 당신들에게 총기를 줄 것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 *박수호 시창작에서 퍼옴* |
2024.07.17 14:43
엄마의 총기 / 고진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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