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김옥순 시인 홈페이지

좋은 글

2014.01.20 23:33

안도현 / 그리운 여우

조회 수 139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그리운 여우 
                                     -안도현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나는 방에 누에고치처럼 동그랗게 갇혀서
희고 통통한 나의 세상 바깥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세상에도 눈이 이렇게 많이 오실 것인데
여우 한 마리가, 말로만 듣던 그 눈도 털도 빨간 여우 한 마리가
나를 홀리려고 눈발 속을 헤치고
네 발로 어슬렁어슬렁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 산길에는 마을로 내려갈 때를 놓친 산수유 열매가 어쩌면 붉어져 있기도 했을 터인데
뒤도 안 돌아보고 여우 한 마리가, 우리집 마당에까지 와서
부르르 몸 흔들어 깃털에 쌓인 눈을 털며
이 집에 사람이 있나, 없나 기웃거릴 것이라 혼자 생각하고
메주 냄새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타구니 속에 두 손을 집어넣고 쪼글쪼글해진
그리하여 서늘하기도 한 불알을 한참을 주물러보는 것인데
그러면 나도 모르게 불끈 무엇이 일어서는 듯한 생기와 함께
나는 혹시나 여우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타박타박 힘없이 걸어내려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사람 소리 하나 안 나는 뒤꼍에서
두리번두리번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살피다가
일찍 군불 지펴넣은 아랫방 아궁이가에 잠시 쭈그리고 앉았다가
산속에 두고 온 어린것들을 생각하고는
여우 한 마리가, 혹시라도 마른 시래기 걸린 소도 없는 외양간 뒷벽에
눈길을 주다가 코를 벌름거리며
그 코끝에는 김나는 이슬 몇방울이 묻어 있기도 할 것인데
아 글쎄 그 여우 한 마리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해서
세상을 차듯 뒷발로 땅바닥을 더러 탁탁 쳐보기도 했을 터인데
먹을 것은 없고
눈은 지지리도 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내리고
여우 한 마리가, 그 작은 눈을 글썽이며
그 눈 속에도 서러운 눈이 소문도 없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나는
문득 몇해 전이던가 얼음장 밑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진
동무 하나가 여우가 되어 나 보고 싶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문을 확 열어제껴보았던 것인데
눈 내려 쌓이는 소리 같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아, 여우는 사라지고---
여우가 사라진 뒤에도 눈은 내리고 또 내리는데
그 여우 한 마리를 생각하며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내 겨드랑이에도 눈발이 내려앉는지 근질근질거리기도 하고
가슴도 한없이 짠해져서 도대체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1. No Image 05Jul
    by 들국화
    2014/07/05 by 들국화
    Views 1243 

    좋은 시란? /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2. No Image 13Jun
    by 들국화
    2014/06/13 by 들국화
    Views 573 

    자전自轉 / 류정환

  3. 윤중호 죽다 / 김사인

  4. No Image 01May
    by 들국화
    2014/05/01 by 들국화
    Views 1090 

    천개의 바람이 되어 / 임형주 (세월호 침몰 추모 시)

  5. No Image 22Apr
    by 들국화
    2014/04/22 by 들국화
    Views 542 

    歸天/ 천상병

  6. No Image 15Apr
    by 들국화
    2014/04/15 by 들국화
    Views 59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호

  7. No Image 04Apr
    by 들국화
    2014/04/04 by 들국화
    Views 692 

    4월 비빔밥 / 박남수

  8. No Image 06Mar
    by 들국화
    2014/03/06 by 들국화
    Views 763 

    폐선廢船/ 강동수

  9. No Image 14Feb
    by 들국화
    2014/02/14 by 들국화
    Views 789 

    세 가지 질문

  10. No Image 11Feb
    by 들국화
    2014/02/11 by 들국화
    Views 928 

    쓴다는 것 / 이정록

  11. No Image 20Jan
    by 들국화
    2014/01/20 by 들국화
    Views 1398 

    안도현 / 그리운 여우

  12. No Image 16Jan
    by 들국화
    2014/01/16 by 들국화
    Views 1753 

    2013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대상 수상작품(운문부 대상 시)

  13. No Image 13Jan
    by 들국화
    2014/01/13 by 들국화
    Views 849 

    빈집 / 기형도

  14. No Image 11Jan
    by 들국화
    2014/01/11 by 들국화
    Views 1028 

    정적(靜寂) / 송수권

  15. No Image 29Nov
    by 들국화
    2013/11/29 by 들국화
    Views 2273 

    묵화 / 김종삼

  16. No Image 29Nov
    by 들국화
    2013/11/29 by 들국화
    Views 2427 

    김춘수, 「處暑 처서지나고」

  17. No Image 29Nov
    by 들국화
    2013/11/29 by 들국화
    Views 1928 

    장편 1 / 김종삼

  18. No Image 29Nov
    by 들국화
    2013/11/29 by 들국화
    Views 1979 

    사평역에서 / 곽재구

  19. No Image 21Nov
    by 들국화
    2013/11/21 by 들국화
    Views 1170 

    옛 이야기 구절 / 정지용

  20. No Image 14Nov
    by 들국화
    2013/11/14 by 들국화
    Views 2208 

    나그네 / 박목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Next
/ 9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