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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는 것을 발명하지 말고 있는 것을 발견하라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바꿔보면, 가장 중요한 진실을 사막의 우물처럼 어디엔가 숨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

눈부신 꽃잎 뒤에 숨어 있는

겨울날의 눈보라와

그 속을 홀로 걸어간 사람을 기억하며

 

아직 꽃피우지 못한 나뭇가지에

가만히 내 숨결을

불어넣는다

―전동균,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부분1)

 

  시인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봄날에 눈부시게 피어난 꽃잎을 보며 경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꽃잎의 눈부심을 위해 혹한의 겨울, 꽃잎의 언저리로 눈보라가 지나갔음을 기억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마음의 눈은 꽃피우지 못한 나뭇가지의 꽃도 피운다. 동아시아의 시학도 이 마음의 눈을 강조한다. 사물의 껍질보다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것이다. 이른바 ‘관물론觀物論’이 그것이다.

 

  관물론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떻게 볼 것인가? 거기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지나치면서도 간과하고 마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어 낯설게 만들기, 나아가 그 낯설음으로 인해 그 사물과 다시금 새롭게 만나기,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시인은 격물格物 또는 관물의 정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주변 사물이 끊임없이 발신하고 있는 의미를 늘 깨어 만날 수 있다. ……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새로워야 한다.2)

 

  우리의 연암도 그림의 리얼리티가 단순히 사실적 묘사에서 오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좋은 그림은 그 물건과 꼭 닮게만 하는 데 있지 않다.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고는 훌륭한 그림이랄 수 없다. 잣나무를 그리려거든 잣나무 형상에 얽매이지 마라, 그것은 한낱 껍데기일 뿐이다. 마음속에 푸르른 잣나무가 서 있지 않고는, 천 구루 백 그루의 잣나무를 그려 놓더라도 잎 다 져서 헐벗은 나목과 다를 바가 없다.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워라. 마음의 눈으로 보아라.3) 또 청대의 시인 심덕잠德潛도 유사한 말을 남겼다. “대나무를 그리는 자는 반드시 완성된 대나무의 모습이 가슴속에 있어야 한다”고.

  그렇다 시인은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을 눈으로 발견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없는 멋진 이미지와 새로운 의미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시인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발명가’가 아니라 ‘발견자’에 가깝다고 생각하라. 이미 이 세상에 와 있으나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보물인데도 보물로 보지 못하고, 숨겨진 의미가 있는데도 의미를 찾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머리를 굴리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시를 기다리지 마라, 발명하려고 하지 말고 발견하도록 애써라. 살갗을 보지 말고 뼛속을 보라.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데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시 「겨울 강가에서」전문이다.4) 이 시의 소재는 겨울 강가에 눈이 내리는 풍경이다. 실제로 어느 겨울날 나는 강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깔리기 시작하는 섬진강을 갔고, 그 전날 내린 눈이 살얼음을 하얗게 덮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대 문득 얼음 위에 내린 눈은 왜 녹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물과 눈송이 사이에 어떤 약속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궁금했다.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곰곰 생각하다보니 이런 시 한 편이 태어났다.

  시의 중간에 등장하는 ‘세찬 강물 소리’는 신문에서 읽은 과학상식 기사에서 힌트를 얻었다. 모든 물소리는 물방울들이 깨지면서 내는 소리가 모인 거라고 했다. 폭포 소리가 큰 것은 물방울들이 더 많이 깨지기 때문이고, 여울에서는 물방울들이 돌멩이에 걸려 깨지기 때문에 물소리가 난다는 것이다.(나는 초등학생들이 보는 과학이나 생물 관련 책을 자주 뒤적거린다. 거기에는 과학적 탐구의대사인데도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나무가 새로 잎을 피워내거나 떨어뜨릴 때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 나무를 노끈으로 묶거나 필요 이상으로 밤에 불빛을 쪼이면 나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등은 얼마나 매력적인 시의 소재들인가.)

 

  참붕어는 산란할 때의 구애 동작이 특이하기로 유명하다. 산란기는 우리나라 삼남 지방에서는 5~6월경이다. 구름 낀 날이나 비오는 날에 산란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이 산란기가 되면 수놈은 자색 띤 회흑색으로 변하는 동시에 산란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호숫가의 맑은 물에 잠겨 있는 자갈이나 조개껍데기를 찾아다닌다. 자갈이나 조개껍데기가 갈린 맑은 물속에서 산란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물색되면 그곳에 약 15cm가량의 원을 그리면서 원 안의 자갈돌에 낀 물때를 깨끗이 청소한다. 청소가 끝난 산란장은 갈색으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청소된 둥근 산란장 주위는 여전히 녹색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깨끗한 산란장이 마련되면 수놈은 그곳을 떠나 암놈이 있는 곳에 찾아가서 한 마리의 암놈을 데리고 온다. 아름다운 사란장이 새로 마련되었으니까 같이 가서 한번 봐달라고 애원한 결과인 것 같다.5)

 

  어류학자의 이러한 관찰은 단지 참붕어의 산란이라는 생태적 사실의 기록에만 그치지 않는다. 건조한 설명 문장 사이사이에 분명히 시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다. 산란장의 묘사는 투명하고, 수놈 참붕어의 구애 모습에는 왠지 인간의 냄새가 묻어 있다.

 

  닭은 크기가 쥐보다 열 배가 된다. 쥐가 닭을 씹어 뱃속까지 뚫고 들어가도 닭은 피할 줄 모르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두 눈을 멀뚱히 뜨고 아무 일이 없는 듯하다. 뱀은 지네보다 백 배나 크다. 지네가 뱀을 쫓으면 뱀은 달아나지 못하고 기운이 빠져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엎드려 있다. 지내가 입으로 들어가면 곧 뱀이 죽는다. 지네는 뱀의 살이 모두 썩어야 나온다. 쥐가 또 거위와 오리를 뚫는데 그것들이 피할 줄을 알지 못한다. 돼지ㆍ고양이ㆍ오리가 모두 뱀을 즐긴다. 닭은 두꺼비 새끼를 통째로 삼키기를 물마시듯 한다. 거미 오줌이 지네에게 닿으면 지네가 물이 되고, 달팽이 침이 지네에게 묻으면 지네의 발이 다 떨어진다. 달팽이는 전갈도 제압한다.6)

 

  조선시대 이덕무의 산문이다. 이 글을 읽다가 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사실의 묘사가 핍진하여 나를 압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떤 쾌감이 이마를 바람처럼 서늘하게 핥고 지나갔다. 이덕무의 실사구시는 단순한 실용주의가 아니라 이렇게 시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세상에 그 어떤 시가 있어 이러한 기운에 대적할 것인가?

 

  꽉 차 있는 물과 완전하게 비어 있는 먼지가 만나 수평선을 이루었다. 터지기 직전까지 차 있는 물과 지치고 지칠 때까지 털어낸 먼지가 만나 둥그런, 아주 둥그런 수평선을 만들었다. 저것들은 원래 만나서는 안 될 어떤 사이였다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하지 못할 것들이 어디에 남아 있단 말인가. 물리적인 어떠한 힘으로도 절대 나눌 수도 쪼갤 수도 없는 저 수평선 앞에서.7)

 

  유용주가 쓴 산문의 한 구절이다. 이 글은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수평선을 바라본 자의 사유가 만들어낸 문장이다. 수평선에 대한 철저하고도 고독한 관찰이 문장 이전에 수행되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포구는 평소에도 시끄럽습니다. 딱딱한 길을 버리고 출렁거리는 길로 넘어가는 곳이라 그런가봅니다. 고체의 길이나 액체의 길 중 한길을 택해야 하는 곳이라 그런가봅니다. 포구는 섬의 문입니다. 섬의 끝이며 바다의 시작이고 바다의 끝이고 섬의 시작입니다. 물에서 포구로 가는 길은 이 길 저 길이 부챗살처럼 모여들고 바다에서 포구로 돌아오는 뱃길은 깔때기처럼 모여집니다. 포구는 뱃사람들이 회사인 바다로 출근하는 길이며 퇴근하는 정문입니다.8)

 

  함민복의 산문이다. 포구라는 대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상상력은 이미 시와 산문의 구별을 무색하게 한다. 시에서 무슨 대단한 발언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이런 산문에서 배워야 한다. 시적인 것은 관찰하는 눈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현상의 이면을 보는 눈

 

  시인의 관찰은 과학자의 관찰에 버금가는 것이어야 한다. 아니, 사물의 현상이나 외피에 집중하는 과학자의 관찰을 넘어 시인은 현상의 이면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과학은 삶을 앞으로 진보시키지만 시는 삶을 반성하게 만드는 양식이기에 더욱 그렇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일은 그 사물의 실체와 본질을 밝히는 첩경이다. 시인은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해서 형상화해야 하는 자이다. 그래야만 독자에게 ‘아, 나는 왜 그것을 보지 못했을까?’라고 뒤늦은 후회를 안겨주면서 속으로 득의만만한 웃음을 띠며 우쭐댈 수 있게 된다.

 

바닷가 고요한 뱃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김명수, 「발자국」전문9)

 

  바닷가 백사장 위에 찍힌 발자국은 누구나 볼 수 있다. 파도가 밀려와 그 발자국을 지우는 풍경도 바닷가에서는 흔하게 보게 된다. 그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가지는 데서 오롯이 이 시가 생겨난다. 발자국 흔적의 행방을 찾는 이 의문은 ‘품어주다’라는 동사를 만나 아연 시적 깊이를 획득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백사장 위에 발자국을 오래 바라보며 관찰하는 시인의 눈을 만나게 된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의 표제작인 다음 시의 제목은 「바다의 눈」이다. 관찰의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 시에서 ‘바다의 눈’은 바로 ‘시인의 눈’이다.

 

바다는 육지의 먼 산을 보지 않게

바다는 산 위의 흰 구름을 보지 않네

바다는 바다는, 바닷가 마을

10여 호 남짓한 포구마을에

어린아이 등에 업은 젊은 아낙이

가을 햇살 아래 그물 기우고

그 마을 언덕바지 새 무덤 하나

들국화 피어 있는 그 무덤 보네10)

 

  세상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 곳을 보기 위해서는 망원경이 필요하고, 미세한 것을 보기 위해서는 현미경이 필요하다. 거대담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7~80년대에 시인들은 주로 망원경으로 사물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미시적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광장’을 바라보던 시인의 눈이 ‘골방’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광장에 서서 망원경을 들고 군중을 바라보던 ‘그’가 골방의 ‘나’로 회귀한 형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외부로 향해 외치던 3인칭의 목소리를 1인칭의 내면 탐구 형식으로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장의 햇빛을 뒤로 하고 골방의 그늘에 들어앉은 시는 그 이전보다 훨씬 촘촘한 상상력이 밀도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골방은 음습해서 점점 자폐적 공간으로 바뀌어 가게 마련이다. 광장을 떠나온 자아는 아예 광장을 외면하거나 기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 단계 한국시의 자폐적 경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인의 눈과 자세를 다시 한 번 점검할 때가 되었다. 시인은 옆에 항상 망원경과 현미경을 함께 준비해두어야 하고, 광장과 골방 사이에서 그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말고 그 둘 사이에서 긴장하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인이란 시를 빚는 사람이면서 자기 자신을 빚는 사람이므로.

 

**안도현 시인의 시 창작 노트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208쪽~217쪽)**

 


1) 정동균,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세계사, 2002, 23~24쪽.

2) 정민, 앞의 책, 380~381쪽.

3) 정민, 『비슷한 것은 가짜다』, 태학사, 2000, 2000, 100쪽.

4) 안도현, 『그리운 여우』, 창비, 1997, 8쪽.

5) 정문기, 『어류박물지』, 일지사, 1974, 44쪽.

6) 이덕무, 『국역 천장관전서Ⅷ』,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89, 48~49쪽.

7) 유용주, 『쏘주 한잔 합시다』, 큰나, 2005, 76쪽.

8) 함민복,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 126쪽.

9) 김명수, 『바다의 눈』, 창비, 1995, 28쪽.

10) 앞의 책,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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